십 오륙 년쯤 막 화순에 이사 왔을 때 우리 가족은 삶의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그 때 화순읍 동구리 산림욕장은 길이 없다시피 했다.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마다 그 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좋았다. 도무지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 날에는 그 가파르고 인적도 드문 길을 하늘이 다 드러나는 끝까지 올라갔다.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올라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조금 전까지 앞이 깜깜하던 일이 별일이 아니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은 해가 기울기 시작한 뒤 산림욕장에 들어섰지만, 기어이 꼭대기까지 갈 참이었다. 초입에서 산림욕장을 빠져나오는 노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노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더니 ‘위에 올라갈라고?’ 물었다. 나는 시선도 부딪치지 않은 채 ‘예’라고 짧게 대답한 뒤 발을 재촉했다. 일이 분쯤 지났을까? 또 다른 노인의 나를 향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그 못가!’ 험해서 못 간다고 할 것이라 짐작하면서 물었다. ‘왜요. 험해서요?’ 험하기에 오르려는데 왜 귀찮게 간섭하는지 성가셨다. 초입에서 만났던 노인이 아직 산길에 남아있는 친구에게 돌아와 내 이야기를 전한 것 같았다. ‘아니. 아니여. 거그 외져. 너무 외지당께.’

그 말에 나는 그만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서 전해오는 진심. 그 진심이 나를 뼛속까지 위로했다. 굳이 외진 꼭대기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울었고 그대로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은 뒤 오랜만에 달게 잤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화(和)하고 순(順)한 이 동네에 평생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화순에 흐르는 선한 기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서울 사는 친구들은 내가 화순에 산다고 하면 오지에 박혀 사는 사람쯤으로 여기고 내게 화순 소식을 물을 때마다 하늘이 얼마나 맑은지, 화순 장터 팥죽 국물 맛은 얼마나 진한지 따위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들려주는 화순 자랑은 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이야기로 어느 날은 이 천박한 물질주의 세상에서 아름다움과 자존심은 어떻게 지켜지는 것인지를 몸소 보여준 동네 카페 사장 이야기를 해 주었고 지금은 내가 가끔 만나는 ‘화순 사람들’에 대해 천일야화를 들려주듯 한명 한명 천천히 들려주는 중이다. 이야기가 다 끝나는 날에는 친구 중 몇 명은 잠시라도 화순에 살겠다고 보따리를 쌀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이 친구들을 데려다 화순을 보여준 날이 있었다. 친구들은 적벽에 환호했고 고인돌 공원과 운주사에 감동했다. 그날 밤 나는 친구들을 아름다운 도장마을 마을회관에 재웠으며 도장마을 부녀회의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다음 날은 당시 한창 관심이 뜨거웠던 송정시장에 가겠다는 친구들을 설득해 등광리에 있는 한국 기독교의 성자 이세종 수도 터에 갔었다. 가끔 친구들이 그곳 소식을 묻는다. 이세종 생가터 복원과 순례길 조성을 위해 관심이 모이는 중이라고 말해주었더니 모두 자기 일인 양 좋아했다.

가을이다. 친구들이 다시 화순에 오고 싶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화순 이야기를 시작할까. 어떤 아름다운 화순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까.


범은경
소아청소년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