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이 있다. ‘종이는 천년을,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라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 있어 지류 문화유산은 기록, 그 이상을 품고 있다. 과학의 발달로 종이의 쓰임은 점차 줄고 있지만 종이가 주는 낭만은 어떤 과학도 견주지 못한다. ‘종이’의 발명은 문명을 기록하였고 이는 인류 발전에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으며 기록은 필서로 서화로 또 인쇄로 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천 년 이상, 수많은 세월을 버텨 해지고 닳아 ‘역사’라는 시간의 기록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나는 지류 문화유산 보존처리 전문가이다. 16세에 시작하여 어느덧 70세의 나이에 들어선 나에게 보존처리라는 작업은 늘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힘들기도 하지만 수많은 지류 문화유산이 내 손으로 보존처리 되어 전시되는 그 순간이 나의 외길 50년의 원동력이었다.

보존처리를 하기 위해 현장이나 연구소에서 만나는 유물들은 늘 누덕누덕 썩고 낡은 모습이다. 너무 낡고 더러워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진 세월을 보낸 것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사계절이 뚜렷하기도 드문 나라에서 이만치 오래 버텨 준 거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지. 그래, 지금이라도 나와 만난 유물들은 얼마나 다행인가. 모진 세월 흔적 깨끗하게 지워주고 새롭게 단장해서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보전의 기회가 온 거일 테니. 가끔은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탄식으로 혼자 말이 나오기도 한다.

예전 내 손을 거쳐 간 어떤 유물을 소개할까 한다. 그 유물은 책으로 된 문서였다. 6.25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두툼한 문서로 표지는 닳았지만 거즈(면)로 책 등을 싸 나름 짱짱하게 장정(裝幀)되어 있었고 내지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미상의 날짜에 빨간 줄이 그어져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매우 간단한 기록이었었으나 빨간 줄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무도 선명한 빨간 줄. 그것은 사망자의 이름이었다. 문서명 ○-○○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와 사망자들의 목록이었다. 너무도 어린 나이의 아들들이었다. 하루 24시간도 채 훈련을 받지 못한 생때같은 어린 아들들이 나라를 위해서 전투하고 돌아오지 못한 너무도 잔인한 기록이었다. 전쟁을 겪지 않은 나는 그 참담함을 알 수 없다. 나라를 위해 육신마저 버리고 돌아오지 못한 그 희생을 기억할 사람이 몇 이나 있겠는가.

나는 이 이름의 희생이 앞으로 더 많은 후손에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최대한 깨끗해지길 바라며 한 장, 한 장 묵은 먼지를 털고 혹여 그어진 그 빨간 펜에 이름이 번질까 오랜 시간 어르고 매만지듯 처리했다. 작업을 마치고 마지막 명제를 붙이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나와 내 가족, 모두가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이 숭고한 이름들이 기록으로나마 영원히 기억되길. 그 바람이 내 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시간의 기록, 보존처리. 그것은 나의 인생이자 과거 누군가의 인생이며 그들의 시간이 내 손을 거치며 영원하길 바란다.


차병갑
호고문화재보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