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민족 그 자체, 지리산
『박현채 평전』 7장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이론을 펼치다
화순저널입력 : 2021. 11. 26(금) 18:40
민족의 한이 서린
지리산을 답사하다



한길사는 1984년 봄부터 『오늘의 책』이라는 교양 계간지를 발행하면서, 자사 간행물에 대한 홍보 및 저자들과의 연대에 나섰다. 박현채는 여기에도 몇 편의 글을 썼다.

1986년 여름에 발간된 제10호에 그는 「지리산의 민족사적 위치」를 기고했는데, 이 글은 한길사에서 그해 5월 제1회 ‘한길역사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 지리산 답사에서의 연설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산행기가 아니라 젊은 날 자신의 이상과 좌절이 절절이 배인 회한의 기록이기도 했다. 박현채는 “저자의 피로 쓴 글만이 읽을 가치가 있다”라는 니체의 마음으로 지리산 굽이굽이를 걸으며 이 글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글은 문학인의 서정성보다 사회과학도로서의 리얼리즘 및 그 분석 틀을 기본으로 삼았다. 박현채는 ‘한길역사기행’에 참여하여 34~35년 전의 험난하고 피로 얼룩진 국토의 상처를 가슴으로 안으면서, 그러나 감정을 자제하면서 이 글을 썼다.

산을 보는 데 있어서 산을 자연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그것도 인간 간의 사회적 관계 위에서 자기를 규정받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일정한 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으로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은 좋은 목재의 산출처나 명당자리, 아름다운 산수, 그리고 좋은 수렵처로 인식될 수 있으나 피지배 상태에 놓여 있는 민중 쪽에서 산은 처절한 삶의 터전이었다.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나 그것은 수탈을 피하고 삶의 터전을 주는 은신처가 되기도 하고 억압에 저항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도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은 민중적 삶에 있어서는 아버지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 박현채, 「지리산의 민족사적 위치」, 『박현채 전집』 3, 해밀, 2006, 22~23쪽


이 땅의 산 가운데 어느 곳인들 겨레의 상처가 배지 않는 곳이 없지만, 특히 지리산과 백두산, 한라산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항쟁과 주검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백두산은 항일 빨치산, 한라산은 4⋅3 항쟁, 지리산은 동학혁명의 패잔병과 빨치산 유격대의 피로 물든 곳이었다. 그래서 어느 법승의 “산은 산이고”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들 산에는 민족의 통한이 서려 있었다. 박현채는 자신의 글에서 조선 말기, 일제 치하,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로 나누어 지리산의 역사를 개괄했다.

특히 그는 전후 남북 분단과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둘러싼 민족적 대립이 지리산을 거대한 군사 기지로 전환시켰다고 보았다. 앞선 식민지 시기에는 외세에 저항하여 민족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민족적 에너지였을 텐데, 전쟁이 터지면서 민족의 새로운 젊은 싹들이 잠들었으며, 그 탓에 박현채는 수난의 땅으로서의 지리산의 한(恨)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상가(喪家)에 가보면 혼주들 중에 유난히 부모상에 섧게 곡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자식이라도 자신의 처지에 따라 슬픔의 강도가 다르고, 호곡의 질량도 차이가 있다. 박현채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타의 평범한 이들과 달리 특히 섧었을 것이다.

지리산이 민족⋅민중운동의 역사에서 큰 한을 머금은 처절한 땅, 산으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생명을 자기 조국을 위해 바친 수대에 걸친 죽음이 층층이 쌓여 있는 산, 그것은 민족의 역사이기도 하고 더욱 깊은 것으로 되어가고 있는 풀 길 없는 민족적 한의 크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산으로서의 지리산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우리들 그 자체로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남한 대토벌 작전’에서 해남 반도의 땅끝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지리산은 우리의 역사에서 민족 그 자체이다.

- 박현채, 「지리산의 민족사적 위치」, 『박현채 전집』 3, 해밀, 2006,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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