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소설 속 조원제로 '복원'되기까지
『박현채 평전』 9장 외골수 지식인, 고난 끝에 날개를 달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1. 28(금) 18:39
줄탁동시,
박현채와 조정래의 만남



박현채가 단재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대로 ‘역사적 상황의 진전’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폭압 통치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증폭되면서 1987년 한국 사회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6월항쟁의 전야였다.

이 무렵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힘겹게 연재하면서 한국 전쟁기 지리산의 빨치산들을 찾고 있었다. 이 소설을 관심 있게 읽었던 박현채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했다.

박현채와 조정래의 만남은 선가에서 말하는 ‘줄탁동시(啐啄同機)’였다. 줄탁동시는 『벽암록』에 나오는 말로, 공안(公案)의 하나이며 선불교(禪佛敎), 특히 간화선(看話禪)에서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달걀은 어미 닭이 품었다가 달이 차면 부화한다. 그때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한다. 반대로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아 껍질을 깨트려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이것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와 온전한 세상을 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비유에는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를 이끌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조정래가 누구여? 나랑 잠 만났으면 쓰겄는디.”

이 말을 앞세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 박현채라고 허요. 근데, 소설 참 맛나게 잘 썼습디다. 아조 재미지게 읽었는디, 앞으로 빨치산 얘그가 본격적으로 나와야 쓸 것 같등마. 워째, 나가 그짝얼 쪼깨 아는 것이 있응께로 들어볼 맴이 있소?”

그 투박한 진짜배기 전라도 사투리가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인가! 빨치산 얘기를 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저는 솟구치는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습니다.

“예, 예, 그런 분을 찾고 있던 참입니다.”
“잉. 그러믄 마침 잘되았소. 내 자서전 대신 써준다고 생각허고 내 이약얼 듣도록 허먼 되겄소.”

이렇게 홀연히 제 앞에 나타난 경제학자 박현채. 빨치산 간부 출신에, 중학교 선배고, 특출한 기억력을 가진 데다, 먼저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니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찰떡궁합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흔한 천군만마(千軍萬馬)라는 말, 박현채 선생이 제 앞에 출현한 것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2009, 233~234쪽


박현채와 조정래는 쉽게 의기투합하여, 작가는 ‘황홀한 글감’을 찾아 그의 비좁은 사무실을 찾아다녔다. 이때까지도 한 달에 두 번씩 중부서 형사가 ‘동향 조사’를 하러 와서 대화가 중단되기도 했다. 박현채는 조정래와 함께 지리산 현장 취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멀고 험한 지리산을 여러 차례 동행하며 빨치산 활동상을 들려주었다.

박 선생은 지리산 준령을 넘고 넘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무도 엿듣는 사람이 없고, 옛날의 비극이 점철된 현장에 들어서 있으니 선생의 이야기는 깊은 회한과 함께 실타래 풀리듯 풀려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석평전(細石平田)의 드넓은 분지에 가을 달빛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선생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여기 세석평전에서 경담도당이 몰살을 당해부렀어. 밑에서는 포위한 군경이 밀고 올라오고, 우에서는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퍼부어대는디 워쩔 수가 있었겄냐. 시체가 늘펀하니 여그덜 다 덮어부렀제. 여그서 지천으로 피는 철쭉은 그냥 철쭉꽃이 아닌 것이여.”

깊은 한숨으로 선생의 목이 메이고, 두 볼에는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과음하신 선생은 발을 헛디뎌 한 길 넘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이 치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선생은 목을 다쳤고, 침을 맞으며 서너 달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저는 죄송스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염치없고 뻔뻔스럽게도 또 지리산을 가자고 했고, 선생은 또 씩 웃으며 “가야제” 하는 것이었습니다.

-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2009, 235쪽


두 사람은 거듭 지리산을 찾았고, 이런 과정을 거쳐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인물 조원제가 태어났다. 박현채가 소설 속에서 ‘복원’된 것이다. 소년 전사 조원제를 통해 박현채를 복원한 조정래는 뒷날 모델의 원형을 이렇게 평가한다.

선생은 준수한 인물에 강건한 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천재적인 머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한 남자다운 기가 승했고, 논리적 원칙론을 바탕으로 결단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정이 많았고, 너그러웠으며,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카리스마는 그런 모든 것들이 융합되어 피어나는 꽃이었습니다.

-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2009,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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