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길 위에 있어.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이 바로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유일한 시도일지도 몰라. 거기 흐르는 것들의 정체를 찾다보면, 누구나 그러하듯 미망이라는 허구렁에 빠지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은 잠시 속주머니에 넣어두어야 하지. 먼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이 터득해야 할 여행 법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야기에 과연 <시간>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오늘은 ‘시간’의 주인공인, 당신의 눈길이 가닿은 어두운 하늘에서 흐르는 트럼펫 소리를 들었다 치자. 그러면 과연, 그 멜로디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걸까. 그런 걸 궁금해한다면 분명 소망하는 일이나 그리움으로 얼마간은 어두운 길을 서성거려본 사람일 테지만.

그런저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아마 당신의 오랜 친구들일지도 몰라. 잠파노는 삼륜차를 몰며 떠돌이로 살아온―가는 광대야. 그리고 젤소미나는 변두리 바닷가에 사는 백치 소녀야. 언니의 죽음을 대신해서 팔려가는 어린 소녀는 단돈 만 리라(lira, 이탈리아 화폐단위)에 노예 같은 삶을 강요받는데, 잠파노를 따라가면 세상의 모든 <길>이 열릴 거라고 했었지. 노래도 배우고 춤도 추고……. 하지만 그녀가 살아야 할 세상은 바닥과 환상, 그리고 고독과 낭떠러지의 <길>이었어.

삼륜차를 끄는 잠파노와 길을 떠나는 젤소미나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 어딘가를 가고 있던 거야. 그곳이 어딘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당신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열망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는지도 몰라. 요컨대, 돌아서야 한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봤겠지만 멱살을 잡아채는 힘센 주먹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당신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리고는 에둘러 구원을 찾아 다시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거야.

그런 당신의 오랜 친구였을 잠파노는 평생의 떠돌이야. 캐릭터로서 야수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지.
“이 사슬로 말하자면, 두께가 만만찮은 무쇠올시다. 강철보다 단단합죠. (…) 흉부 근육만으로 뚝 끊어 보이겠습니다. (…) 이걸 끊자면, 허파를 풍선처럼 부풀려야 하고, 그러다보면 핏줄이 터져, (…) 여러분 가운데 심장이 약하신 분은 안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잠파노는 대중을 향해서는 강철보다 단단해 보이면서도 비굴한 구걸을 일삼는 사내이지만, 젤소미나에게는 폭력적으로 군림하는 연약한 사내일 뿐이지.

그런 잠파노의 뒷모습은 흑백의 그늘처럼 위태롭게 보였는데, 당신이 줄곧 놓치며 살아야 했던 희망일지도 몰라. 그래서 이런 물음이 떠오르는 건 당연할거야.

―당신은, 아담한 집 모퉁이의 텃밭을 가져보았니?
흙을 일구면서 울긋불긋 피어날 꽃들과 야채가 풍성한 밥상을 상상하며 씨앗들을 뿌려보았니? 당신은 토마토를 심어보았니? 하지만 토마토가 다 자랄 때까지 그곳에 머물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천진한 젤소미나를 이끌고 또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잠파노가 바로 <당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봐. 젤소미나의 씨앗에 담긴 ‘작은 세계’가 인간이 꿈꾸는 영원을 향한 여행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젤소미나에게 일어난 사소한 변화가 이 영화의 갈등을 증폭시키게 되는데, 바로 우또라는 줄타기 광대와의 만남이지. 서커스단에서 만난 우또는 젤소미나의 눈빛을 반짝거리게 해주었지. 우또는 잠파노와 달리 웃음을 주고 나팔소리를 주었어. 그리고 또 무언가를 젤소미나의 가슴에 가득 안겨주었는데, 그건 ‘손’이었고 어떤 ‘감정’인 거 같았어. 인간과 인간이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 그걸 <사랑>이라 말해도 좋고, 또는 새로 발견한 <길>이라 해도 좋아. 어쨌든 젤소미나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던 존재에서 새순을 움트는 신기한 생명력을 얻은 거 같았지.

젤소미나와 우또

하지만 잠파노에게 우또는 위험한 존재일 뿐이야. 벽돌을 쌓아 올릴 수 없는 떠돌이에게 ‘사랑’과 ‘텃밭’은 금기의 세계인 거야. 곧 떠나야 하는 광대의 운명에 안정감 넘치는 정착의 비유들은 종말을 암시하는 불길한 기표로 느껴진다는 거지. 그런 우또를 공격하는 잠파노와 우또를 잃고 <길>을 잃어버린 젤소미나의 비극은 동물적인 생존본능조차 위협받게 하지. 뿐만 아니라, 젤소미나는 더이상 춤을 추지도, 노래를 부르지도, 북소리를 울리지도 않아. 잠파노를 바라보지만 초점 없는 눈으로는 이미 거세된 존재로 전락하지.

이제 더이상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없는 비극의 지점은 결국 오늘 당신이 마주친 횡단보도의 신호등일지도 몰라. 영원히 깜박거리기만 하는 노란 신호등일지도 몰라. 그래서 건너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먼길>. 하지만 더이상 머뭇거릴 수 없어서 질주하는 자동차와 경쟁하듯 달렸다면, 과연 당신의 운명은 어떤 해답을 가지게 될까.

무사히 길을 건넜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하늘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은 분명 듣게 될 거야.
……밤하늘에 흐르는 트럼펫 소리, 그 익숙한 멜로디는 바로 ‘젤소미나의 테마’야.
당신은 아직 길 위에 있고, 평생 길을 떠날 수 없는 떠돌이는 핍진한 얼굴의 젤소미나를 두고 먼길을 떠나고 말았어. 그러나 먼 길을 떠돌아온 잠파노가 당도한 곳은 늘 그렇듯이 <길>의 종점이 될 수는 없었어. 다만 당신이 오늘 밤 안녕을 약속한 보금자리를 찾아야 하듯이, 잠파노 역시 남루한 허물을 잠시 벗을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했겠지. 하지만 잠파노에게 ‘보금자리’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천형(天刑)의 허구렁이었다는 거야. 그걸 깨달은 순간 잠파노는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거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팔소리 아무리 둘러봐도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데, 물론 오늘 밤 당신이 찾아야 할 숙제는 아니야. 애초부터 그런 물음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나팔소리는 환청에 불과할지도 모르거든. 하지만 늙고 지친 잠파노는 어느덧 자신의 본능에 귀기울이게 된 걸지도 몰라. 아니면 기억 밖으로 밀쳐내려 했던 <젤소미나>라는 절체절명의 고독이 되어버린 자아와 길항하는 삶―‘생활의 재발견’이 가능해진 걸까.

―당신은 영혼이 빠져버릴 만큼 울어보았니?
영화는 다시 질문을 던지는 거야. 그래서 물결치며 달려왔다가 썰물, 하는 절규의 나중에는 무엇이 남을까. 잉걸불이 사그라진 뒤 온기조차 사라지면 영롱한 무엇이라도 남길 바라겠지만, 바람벽을 장식할 여행의 기념품이라도 선물로 남기를 바랄 테지만, 당신이 꼭 놓쳐서는 안 될 게 있어,
“난 아무도 필요 없어. 나는 혼자야. 혼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서도, 그리하여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사위가 캄캄해지는 동안에도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리고 잠파노의 절규와 탄식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당신이 아직 <길>을 서성거리고 있다면 말이야.

길 (La Strada, 1954년 작)
감독 : 페데리코 펠리니
출연 : 안소니 퀸(잠파노 역), 줄리에타 마시나(젤소미나 역)

채어린(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