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여 깊어라!
도깨비는 멸종하였는가?
어둠 혹은 미지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풍요로운 상상력의 보고였던가!
화순저널입력 : 2021. 07. 21(수) 20:07
칼 구스타프 융 (1875~1961 심리학자)
우리는 밝음과 어둠에서 각기 어떤 인상을 받는가? 대개는 밝음에서 낮, 삶, 따뜻함, 생동감 건조함, 희망, 환희, 즐거움, 자유로움, 당당함, 해방 등의 인상을 떠올린다. 어둠에서는 밤, 죽음, 차가움, 정적, 축축함, 절망, 우울, 슬픔, 구속, 무서움, 공포 따위의 인상을 떠올리지 않는가 싶다. 밝음과 어둠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에게 있어 밝음은 의식, 현실, 분별, 이성, 유한, 빛의 세계 즉 ‘자아’(ego) 세계이며 어둠은 무의식, 상징, 신화, 꿈, 무한, 영원 즉 ‘자기’(self)의 세계이다.

자아의 세계는 문명화된 현실이며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합리성이 지배하는 의식과 이성적 분별의 세계이다. 반면에 자기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무의식의 심연에 깊이 놓여있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archetype)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또한 융은 ‘플레로마’(pleroma)와 ‘클레아투르’(cleatur)를 언급한다. 플레로마는 자기의 세계이고 원형의 세계이고 영원의 세계이며 근원의 세계이다. 클레아투르는 자아의 세계이고 의식의 세계이고 분별의 세계이다.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르 양자는 서로 대립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각자의 세계를 승인하고 용인한다.

플레로마는 부단히 클레아투르에로 자신을 현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작동하는데, 이는 플레로마의 무(無)로도 소멸되지 않고 클레아투르의 구별로도 소멸되지 않는 고양과 상승의 변증법적 운동의 과정으로 플레로마는 클레아투르를 통하여 자기를 실현하고 승화한다. 이러한 과정이 곧 ‘개성화’(individuation)의 원리이다. 플레르마가 자신을 클레아투르의 시공(時空)에 체현하는 원초적인 사건의 하나가 곧 우리의 생(生)이다.

이 둘은 흔히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의 관계에 비유되기도 한다. 원효의 말을 들어보자. “…진여문 중에는 이(理: 본질적 원리)는 포함되나 사(事: 현상의 사물)는 포함되지 않고, 생멸문 중에는 사는 포함되나 이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두 문은 서로 융통하여 그 한계가 분별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어느 것이나 각기 이와 사의 법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문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라고 하였다.” (…眞如門中攝理而不攝事 生滅門中攝事而不攝理 而今二門互相融通 際限無分 是故皆各通攝一切理事諸法 故言二門不相離故) 이처럼 자아(클레아투라)와 자기(플레로마) 그리고 생멸문과 진여문이 대립과 적대의 개념이 아니듯이 밝음과 어둠도 서로 배척하는 개념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특히 코기토의 선언으로 표현되는 이성의 권능에 기반한 근대 문명)은 밝음 즉 자아의 세계 혹은 생멸문의 세계만을 추구해 왔다. 의식과 이성의 빛이 닿지 않은 세계는 맹목이며 미신이었다. 그것은 합리성에 의해 재단되고 분별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리하여 문명은 의식과 이성의 경계를 넘어선 영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겸허함을 상실했다.

어둠 혹은 미지의 세계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풍요로운 상상력의 보고였던가? 그 상상의 공화국에는 천지왕, 바지왕, 소별왕, 대별왕, 강림도령, 오늘이, 왕장군, 바리데기, 사마장자, 우마장자, 칠성님, 옥녀부인, 감은장아기, 성주신, 조왕신, 노가단풍자지명왕, 서천꽃밭 꽃감관, 삼신할멈, 쇠도령, 너도령…, 그리고 수많은 도깨비들과 꼬리 아홉 달린 여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당당한 인민으로 시원(始原)의 시간을 활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어둠의 갈피들을 비단자락처럼 펼치어 우리들의 유년을 천 갈래 상상의 공화국으로 인도하고 보드라운 손길로 아득한 꿈의 머리맡을 고요히 지키시던 할배, 할매들, 아 자애롭던 무당들…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이들은 컴퓨터와 입시학원으로 추방당하고 할배, 할매들은 굿판과 주술의 입을 잃고 양로원과 노인당과 공원으로 고려장 당하거나 텔레비전의 유혹에로 유폐당한, 무료하고 권태로우며 존재감을 상실한 늙은이들이 흐린 눈으로 쓸쓸하게 망연히, 일몰에 침잠하며 여생을 어찌할 수 없이 서성이고 있다.

문명은 비가시의 영토와 공존하지 않는다. 밝음의 폭력에 어둠은 끊임없이 살해되고 있으며(우리의 생활용품에서 옻칠 제품이 사라져 가듯 ‘칠흑(漆黑) 같은 밤’은 물리적으로도 전등의 휘황한 밝음에 마구 찢기고 있다. 도시는 무한의 소비와 끈적한 향락을 부추기고 자극하는 네온사인과 광고 간판들, 시골은 길가의 의미 없는 가로등 불빛에 식물은 괜한 불면을 앓고 양계장의 닭도 밤을 낮으로 바꿔치는 탐욕스런 전등으로 하여 단 하루도 어둠의 품에 포근히 안겨 고단한 생을 편히 휴식하지 못한다.

오, 참혹한 불야성! 저 밝음을 위하여 자연은 또 얼마나 수탈당해야 하는가? 상상의 공화국은 멸망하고 그 인민들은 멸종하였다. 우리에게 죽음도 어둠의 빛깔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얀 소복을 입었다. 소복의 素자는 원래의 바탕색을 의미한다. (우주의 순환 속에) 원래의 왔던 곳(바탕)으로 돌아감 그것이 곧 죽음이었다. 요즘은 검은 양복과 치마저고리를 입지만 그것은 밝음(서양 문명)이 삶과 죽음의 이분법에 기반하여 어둠에 종말의 의미를 덧씌운 부정적인 이미지를 우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무심코 받아들인 게 아닐까 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 어둠은 곧 폐기되거나 부정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음과 양이 어우러져 만물을 낳듯 밝음과 어둠 모두가 우주의 한 몸임을 인식하고 어둠의 의미와 풍요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고요한 성찰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플레로마와 클레아투라의 자기실현 혹은 진여문과 생멸문의 장엄한 이사무애(理事無碍)….
밤이여 깊어라!
<김다록 자유기고가>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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