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3)
화순저널입력 : 2021. 04. 09(금) 18:51
좌익 친척들과
해방을 맞이하다



박현채는 회갑을 앞둔 1992년 말(당시 58세) 주위의 권유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회고록 분량은 200자 원고지 240매, A4용지 23매였다. 출생에서부터 지리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게 되는 과정까지 기록되어 있다. 박현채는 평생 많은 글을 썼지만, 정작 자신에 관한 글은 별로 남기지 않았다. 이 ‘미완의 회고록’이 남아 있는지라 그나마 박현채의 소년 시절을 그의 시선으로 복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회고록 역시 주인의 신산했던 생애를 닮은 탓인지 곡절이 많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박현채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989년 광주의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로 올라온 박현채는 찌는 날씨와 싸워가면서 ‘독수리 타법’으로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기 삶을 그려 나가던 그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실의와 병마가 뒤따랐다. 1990년대 초 동구권의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이다. 평생 신념처럼 간직했던 사회주의의 몰락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재빨리 전향한 인텔리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는 자신의 신조를 버릴 수 없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뇌에 이상이 생긴 탓에, 말끝이 어눌해지고 행동도 자유롭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쓰기 시작한 회고록은 한 자 한 자가 고통이고 피눈물이었다. 그래서 지인들은 이 회고록을 ‘박현채 말년을 갉아먹은 독’이라고 일컬었다. 글을 매듭짓지 못한 채 주인공은 쓰러졌고 가족들은 병수발에 경황이 없었다. 박현채가 오랜 투병 끝에 1995년 덜컥 눈을 감게 되면서 회고록은 잊혀졌다. 이후 박현채의 후배로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정윤형(鄭允炯, 1937~1999)이 박현채가 남긴 자료들을 챙기다가 이 회고록을 찾아냈다. 뒤늦게나마 회고록은 인터넷신문 『코리아포커스』에 2005년 10월 18일부터 10월 28일까지 연재되었고, 2006년 발간된 『박현채 전집』 (전7권)의 제1권에 수록되었다.

우수한 두뇌와 건강한 체력을 가진 박현채가 일생을 신산하게 살아가게 된 데에는 ‘방황하는 세대’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의 ‘가족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친인척 중에는 이념가가 적지 않았다.


해방은 박경민 당숙의 5구 라디오 앞에서 조주순, 박석민, 박경민, 아버지, 나 등 온 가족이 함께 맞이했다. 당시 조주순 삼촌은 그간에 우리 집을 박헌영 동지와의 접선을 위해 수시 밤에만 드나들었으나 8⋅15 이틀 전에 화순을 떠나 아예 우리 집에 기식하고 있었다. 그는 살기 위해 화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이제 지게꾼이라도 해야겠다며 우리 집에 와 있었다. 그때 나는 화순의 큰 주조장〔양조장-필자〕 부잣집 아들이 왜 다른 직업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을가 하고 생각했었다. 박석민 아저씨는 우리하고는 가까운 친척이고 아버지의 중학교 선배였다. 우리 외할아버지의 누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학생사건 때 퇴학당하여 서울에서 자유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전쟁이 격화되니까 광주 우리 집으로 피난 와 있었다. 그의 큰 딸이 나와 동급생인데, 해방되었을 때 그는 한글을 자기 아버지에게 배워 다 깨치고 있어 나를 일시 실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3~34쪽


일제 말 국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인물이며 해방공간의 주역 중 하나였던 박헌영과 삼촌 조주순이 박현채의 집을 아지트 삼아 ‘접선’을 했던 것이다. 박현채는 당숙 박정민이 당시 화순군 북면 원리 박 부자의 작은아들로 일제에 협력하여 경방단(警防團, 일제강점기 친일 관변단체) 부단장을 지냈으나 나름대로 민족해방 세력과 연을 맺고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다. 박정민이 조주순과 수시로 공개적으로 만났기에 이렇게 짐작했던 것이다. 또 해방되는 날 조주순이 라디오 방송을 처음 들은 후 일본의 패전을 결론짓고 일어서 나갔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방송을 끝까지 듣고 나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도록 잔치를 벌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조주순은 공산당의 전남 공청위원장을 맡아 박헌영을 수행하면서 서울에 다녀왔고, 생황을 꾸리면서 정치 운동을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것이 12살짜리 소년 앞에 펼쳐진 해방의 풍경이고 친척들의 역정(歷程)이었다. 이 같은 가족사라면 그 누구라도 일찍 정치의식에 눈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덕분에 박현채는 국민학교 6학년 때 학생자치위원장에 뽑혔고 에드거 스노의 책을 탐독하게 되었다. 국민학생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수준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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