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성격,
전임 박차고 보따리 장사로


제대한 박현채는 1963년 2월 농연의 연구원으로 복귀하는 한편, 서울 상대와 농협대, 국학대 등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보따리 장사’는 1989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취직’할 때까지 26년간 지속되었다. 사실 서울 상대 교수들은 박현채를 전임강사로 채용하기로 했고, 이 사안을 인사위원회에서도 통과되었다. 발령장을 받는 요식 절차만 남겨둔 상태에서 그를 환영하는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여기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박현채의 거친 근성이 발동하여 파국이 오고 만 것이다.

박현채는 서울 상대 전임강사들에게 선배나 교수 대접을 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전임강사가 회식 자리에서 몇 가지 주의를 주었다.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자기 후임이 되는 상황이므로, 귀에 거슬리는 말을 몇 마디 했던 모양이다. 박현채는 상판을 으등거리며 노려보다가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상을 뒤엎어버린 것이다. 나이 많은 교수들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상을 뒤엎었으니, 박현채는 그 길로 서울대와는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전임 자리를 놓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박현채의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오해하기에 딱 알맞은 ‘행패’였다. 상을 뒤엎은 행위는 이후에도 종종 있었고, 가까운 지인들과 불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반체제적’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성격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워낙 유별났기 때문이다.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그는 거칠고 과격해 보이기까지 했다. 선배나 은사들 앞에서도 본인이 보기에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큰소리로 윽박질러 판가람을 내야 직성이 풀렸으므로 이런 그의 성격 때문에 ‘장비’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

그러나 박현채의 내면에는 관용과 자상함이 함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관운장(관우)’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법도 하다. 특히 후배들을 대할 때 그런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후배들에게는 심하게 말해서 폭군과 다름없는 태도를 보이다가도 다른 편에서 따질라하면 하나하나 짚어 얘기하는 자세가 그러했다.

박현채는 어쩌다 술 몇 잔을 마시면 육두문자도 거침없이 내뱉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독재자를 이웃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말했다. 이런 거침없는 언행으로 아슬아슬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인연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여러 분야의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는 이들과 교우해나갔다.

서울대 전임강사 자리를 내던진 박현채는 각 대학의 보따리 장사에도 연명하면서 학문에 정진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강사 생활은 생활이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박현채의 생활도 가난과 궁핍이 따랐다. 8월에 첫딸 순정이 태어났다. 모처럼의 경사였다. 이 무렵 서울상대 학생들이 후진경제연구회라는 학술 동아리를 만들어 박현채를 초청했는데, 그는 이 모임에 나가 젊은 지성들과 어울려 토론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1963년 10월, 야당의 분열에도 박정희는 윤보선을 간신히 누르고 민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경제개발을 서둘렀다. 일본에서 개발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했고, 이는 야당과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964년 3월 9일 야당의 주도로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3월 24일 서울에서 대학생 5천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시작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로 구속된 학생들의 영장을 기각한 법원에는 공수부대 소속 군인들이 난입했다. 6월 1일에는 1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대일굴욕외교를 규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신악이 구악을 뺨치는 부정부패로 쿠데타의 명분을 잃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