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파괴적 폭력 성찰 "폭력의 위상학"
‘부정성의 폭력'에서 ‘긍정성의 폭력’으로
성과주체, 자신을 착취, 소진, 폭력의 가해자이자 희생자
성과 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이다
화순저널입력 : 2021. 06. 18(금) 06:55
<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폭력의 위상학>은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지은 ‘폭력’에 관한 사유를 담은 에세이이다. 전작 <피로사회>의 저변에 깔린 문제의식을 폭력의 논리로 고찰한다.

<폭력의 위상학>은 1부 ‘폭력의 거시물리학’과 2부 ‘폭력의 미시물리학’으로 구성 되어 있다. 1부는 전근대, 근대, 후기근대의 폭력의 작동양식과 그것의 정치적 사회적 의미 그리고 주체들을 분석한다. 2부는 주로 성과주체가 당면한 폭력의 양태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을 다양한 측면에서 기술한다.

전근대 사회의 폭력은 “사회적 실천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로서 주로 절대 권력의 주권자가 잔혹한 고문이나 공개적인 처형을 통해 폭력을 전시함으로써 권력을 과시하고 그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근대사회는 규율 권력의 사회로서 전근대 사회와 같은 가시적인 폭력은 사라지고 “피하皮下로, 커뮤니케이션의 뒤편으로, 모세관과 영혼의 공간”과 같은 비가시의 영역으로 물러난다. 예속주체에게 규율을 내면화하여 자기 자신의 일부로 수용하게 하며 그 결과 ‘폭력을 자연화’ 한다. 이러한 폭력의 자연화는 육체적 군사적 폭력을 배제하면서도 기존의 지배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초자아의 강력한 작동이며 양심은 초자아에 각인된 사회적 의식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폭력이 타자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부정성의 폭력’이라면 후기 근대의 ‘성과주체’는 주체가 자신에게 착취의 폭력을 행사하는 ‘긍정성의 폭력’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 자기 착취가 타자의 착취보다 더욱 효과적인 성취를 가져 온다고 한다. 성과주체는 내면에 식재된 이상자아(理想自我)를 열망하며 더 많은 성과를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를 자유로 느끼는 감정속에서 자신을 착취하면서 소진시키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희생자가 된다.

2부는 성과주체의 폭력을 여러 측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룬다. 시스템, 권력, 긍정성, 투명성, 매스미디어, 지구화, 리좀, 호모 리베르 등 여러 장에서 성과주체가 자신에게 행사하는 폭력의 특질과 양상 그리고 그것이 오늘 성과주체들의 삶을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는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더불어 약간의 아쉬움도 동반한다. 일부 논리의 전개가 원용하는 이론과 주장의 단순화와 일면적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그것이다. 예컨대 ‘리좀적 폭력’의 장에서 호출된 ‘기관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 CsO)나 ‘리좀’(Rhizome)의 개념들도 그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기관 없는 신체를 곧 악마적으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암세포의 이미지로만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향적이지 않나 싶다. 기관 없는 신체의 창조적 잠재성의 측면을 간과 한다.

“…먼저 하나의 지층에 자리 잡은 다음 이것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실험해 보고, 거기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우발적인 탈영토화의 운동들, 가능한 도주선들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시험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흐름들의 접합 접속들을 확립하고, 각 절편마다 강렬함의 연속체들을 시도해 보고 , 항상 작은 땅뙈기를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사회구성체 안에 있다. 먼저 우리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가 존재하는 장소에서 그것이 어떻게 층화 되어 있는가를 보라. 그런 다음 지층들을 떠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좀 더 깊은 배치물로 내려가라. 그리고는 배치물을 가만히 움직여 고른판 쪽으로 이동시켜라. GsO는 바로 이런 식으로만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발언이다. 우리의 삶은 우선 층화의 갈피에 입주한다. 층화의 작동 없이 사회의 존립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탈기관체의 방향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고 창조하기도 한다. 층화와 탈기관체가 결코 형식논리적인 대립의 개념만은 아닐 것이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다>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 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리좀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는 탈조직 혹은 탈기표· 탈주체화와 함께 새로운 배치의 형성이며 ‘동일한 것’의 무한 복제나 자기 증식이 아닌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의 존재론에 대한 언명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주체에 대한 지은이의 독창적인 사유와 분석은 마치 시대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자본의 시선으로 자본의 욕망에 동일화된 주체로서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하는 주체, 자본의 시선이 응결된 “습관들, 다름 아닌 습관들- 나라고 말하는 습관들”의 우울한 초상이다. <폭력의 위상학>은 자기파괴적인 폭력의 시대를 성찰하는 진지한 죽비소리를 제공할 것이다.

“오늘의 투명 사회에서 특징적인 것은 포르노적 현시와 파놉티콘적 감시가 서로를 넘나든다는 점이다. 네트워크는 노출증과 관음증이 공급하는 양분을 먹고 전자 파놉티콘이 된다. 감시사회는 주체가 타자의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욕구에 따라 스스로를 노출할 때, 즉 자신의 비밀스런 사적 영역을 침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이를 뻔뻔하게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해질 때 비로소 완성 된다. 성과사회 역시 자유와 자기착취가 하나가 될 때 최대의 효율에 이른다. 남김없는 자기조명과 착취는 하나다.”

“폭력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주인과 노예,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되는 단계에 이르러 완결된다. …오늘날 우리 모두를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추방령은 주권의 추방령이 아니라 성과의 추방령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성과주체, 자유인homo liber 또는 자기 자신의 주권자의 모습을 한 성과주체는 스스로 성과의 추방령 속으로 들어가 호모 사케르가 된다. 성과 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이다.”

자유기고가 : 김다록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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