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내걸지언정
그 길을 가야겠으니


소년 빨치산들은 노령산맥을 넘어 담양 순창간 국도변에 있는 한 농가에서 밥을 시켜 먹은 뒤 옥과로 가기 위해 산을 넘었다. 그사이 눈이 많이 내려 산은 온통 설산으로 변해 있었다. 부대가 목적지를 광주 무등산 보을로 정하고 행진을 계속할 때 박현채는 중대한 결단을 했다. 보을로 가기 전에 담양 창평에 피난 중인 부모님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나〔박현채-필자〕는 동지들에게 이 뜻을 전하고 40리 광주 쪽으로 더 가야 하는 창평에 가서 부모를 뵙고 2, 3일 후에 보을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약간의 식량과 단도 하나를 소지품으로 하는 혼자만의 창평행은 당시 상황에서는 지극히 비장한 것이기도 했다. 내가 가진 단도는 외삼촌한테 얻은 것이었다. 나는 창평까지 무사히 혼자 갈 수 있었다. 대덕을 거치기는 했으나 창평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는 광주로 들어가신 뒤였고 아버지만 남아 계셨다. 아버지는 고모부 동생 집에 혼자 계셨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가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내일을 계획했다. 아버지는 광주에 들어가시고, 나는 당분간 길이 트이는 대로 고향이나 보을로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다음 날 경찰부대가 창평에 들어와 주둔했으므로 나는 창평을 떠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다음 날 바로 광주로 떠나셨다.

경찰은 그 뒤 5, 6일이 지나서 점령지 확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경찰이 떠난 바로 그다음 날 나는 고모부 누님의 길 안내로 고향을 떠났다.

- 박현채, 「육필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27쪽

이후 박현채가 외가 작은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박현채의 어머니도 아들이 고생 없이 평탄하게 공부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랐다. 박현채는 어머니에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맹목적으로 주어진 것을 따르는 게 아니라 역사를 보는 자기 신념에 입각해 지켜야 할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스스로 가지 못할 때 삶의 의미는 사라질 것이므로, 목숨을 내걸지언정 이 길을 가야겠다는 것이 박현채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이런 아들의 주장을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동복면 독상리 지방자치대의 검문으로 박현채는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동복면당까지 연행되었다. 이들을 연행한 독상리 지위대장은 외할머니의 소작인이었던 뱀장사였다. 면당에 가서 보니 상당수가 아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아저씨뻘되는 오지호가 있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박현채는 자신의 몸을 피한 게 밝혀진 만큼 면당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이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나 입산을 도와달라고 요구했다. 면당에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박현채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현채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다시 입산을 결행한다. 빨치산 부대에 합류하여 처음에는 지구정보과 분트(bund, 공산주의자 동맹이나 연합을 뜻하는 독일어)에서 안팎의 동향을 파악하며 지냈다. 부대가 비무장으로 백아산 지역을 헤매고 있을 때는 군경의 추적을 받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후 부대가 재편되어 광주 지구 부대원으로 편입되었고, 후방부 연락병으로도 차출되었다. 연락병 시절, 참모부에 갔다가 광주서중 교장이었던 박준옥을 만나기도 했다. 그가 요원으로 데리고 있던 제가 김장호가 투항하면서 참모부에 소환된 것이었다. 연락병으로 지낸 지 한 달 가까이 지나서 박현채는 돌격중대로 발탁되어 문화부 중대장으로 임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