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가 조직 활동에 투신하고 있을 때 여운형이 피살되고(1947년 7월 19일), 장덕수(張德秀, 1895~1947)도 암살되었다(12월 2일). 김구가 단정 수립에 반대하여 「삼천만 동포에 읍소함」이라는 통절한 성명을 발표하고(1948년 2월 10일)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1948년 단독정부(단정) 세력은 5⋅10 총선으로 국회를 구성하고,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제주에서 단선⋅단정 수립을 반대하여 4⋅3항쟁이 발발하고, 10월에는 전남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가 제주 4⋅3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제14연대를 제주도에 급파하기로 하자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여수, 순천 일대를 장악하면서 정부군과 대치했다. 정부는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사고문단의 지원 아래 진압작전에 나서 여수, 순천을 차례로 수복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의 희생이 뒤따랐다. 반란군은 지리산 일대로 들어가 유격대로 전환, 본격적인 유격 활동을 전개했다. 박현채에게 여순 사건은 생애를 두고 자신을 괴롭혀온 이념적⋅사상적 활동의 장벽이 되었다. 그리고 ‘소년 빨치산’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48년의 여순 반란은 나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여순 반란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에 의한 큰 반동을 구체화시켰다. 우리에게서 A조에서 조직이 학련에게 폭로되어 박정재와 최은주가 징역 2년을 복역하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9쪽

이 무렵 박현채는 자신의 진로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2개월 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고 목포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광주서중 교감이던 아버지의 후배로부터 교내에 몰아닥쳤던 정치적 긴장이 사그라졌으니 학교로 돌아오는 게 좋겠다는 편지를 받고, 다시 광주로 올라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철승(李哲承, 1922~)이 결성을 주도한 학련의 테러는 광주서중에서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고, 박현채 역시 시련을 겪었다. 그는 학련의 고발로 경찰에 몇 번 잡혀갔고, 1950년 봄에는 학련에 잡혀 대인동 학력 본부로 끌려가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학련의 감찰부장 임병성이 들어와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정당성을 토론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를 하면서 박현채는 그와 토론을 벌였다. 그날 논의 끝에 임병성은 박현채의 견해 중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박현채와 의형제를 맺었고, 광주서중의 학련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은 후 이 사실을 밝히면서 누구도 박현채를 건들지 말라며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박현채를 보호해주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중학생이 사회의식으로 무장하여 갈등과 분쟁을 겪고 투쟁해나가는 상황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은 청소년들은 ‘방황하는 세대’로서 성인 사회의 축소판처럼 이념 및 정치노선을 견주어야 했다. 이는 식민지 시기를 거친 후 해방공간에서 이념 투쟁과 좌우 대립을 겪어온 이들에게는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겪기 어려운 일들을 이 시기의 10대들은 이미 지켜보거나 겪엇다. 게다가 박현채는 이데올로기적인 가족사까지 겹치다 보니 동년배들보다 훨신 앞서나가는 ‘소년 투사’가 되었다.

박현채가 17살 되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미⋅소의 군대가 각각 남과 북에 진주하고, 양쪽에 분단정부가 수립되면서 전쟁은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셈이다. 김구는 분단정부수립론이 제기될 때 동족상쟁을 우려하면서 남북협상론을 제기하고 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무위에 그치고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한반도는 해방 5년 만에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수백만 명의 희생을 가져오고 많은 사람의 운명이 뒤바뀌는 갈림길이 되었다. 박현채도 그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