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작 「분단 시대의 국가와 민족 문제」 평론을 집필하다
『박현채 평전』 8장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화순저널입력 : 2022. 01. 07(금) 19:52
사유의 영역과 폭이 넓어진
‘논설의 생산 공장’



1987년의 한국 사회에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려는 거대한 변혁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침내 노태우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6⋅29선언을 발표했다. 7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었는데, 8~9월에는 전국에서 200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 3300여 건의 파업이 벌어지고 1200여 개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다. 2학기 개강과 함께 전국 95개 대학의 학생들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하면서 항쟁의 불길은 더욱 뜨겁게 다아올랐다.

정계에서는 김대중⋅김영삼이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양김이 독자 후보로 나서 군부 세력을 대표하는 노태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민주화 투쟁의 전위에 있던 비판적 지식인들도 이념의 성향 및 지역⋅인맥에 따라 두 패로 갈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대선 결과는 군부 정권의 연장으로 마무리되었고, 민주 진영에서는 양김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을 두고 땅을 치며 한탄했으나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이 무렵 한 언론인이 박현채를 찾아갔다. 박현채는 김대중과 가까웠으므로 당연히 김대중 지지론을 펼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국면에 대한 그의 인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대선에 대한 박현채의 입장을 살펴보자.

우리의 힘이 결코 크지 않기 때문에 보수 야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김대중 후보는 보수 정치인으로서는 변화의 가능성을 최대한 추구하여 운동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지해야 한다. 후보 단일화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고, YS로 단일화한다고 해도 노태우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대선 30일 전에 분당한 DJ가 600만 표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비전이 있다. 이제 운동권은 합법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평민당에 들어가야 한다.

- 이미숙, 「박현채 선생과 함께한 10년」, 『아! 박현채』, 해밀, 2006, 199쪽


박현채는 “철저하게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역사와 현실을 조망했다. 좌편향이든 우편향이든 이상주의를 늘 경계했다.” 그는 공허한 이념이나 이론을 경계하고 실천성이 없는 학문이나 단체를 배격했다. 물론 그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정치적 시류에 휩쓸리거나 편벽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급격한 정세 변화 때문이었는지, 박현채는 1987~1988년에 특히 글을 많이 썼다. 사유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글을 발표하는 매체도 다양해졌다. 지인들은 그를 두고 ‘논설의 생산 공장’이라 부르곤 했다.

1987년 12월에는 그동안 쓴 글 중 34편을 묶어 『역사⋅민족⋅민중』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다. 이전의 저술과 비교해보면, 주제도 다양해졌고 내용의 질적 수준도 높아졌으며 사회 현상에 대한 인식과 평가도 그만큼 확장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는 눈여겨 볼 만하다. 그전까지 한국 현대사 분야는 학자들 사이에서 방치되어 있었는데, 1980년대 들어서 송건호, 리영희 등 언론인 출신의 진보적 학자들이 이 문제를 천착하기 시작했고 박현채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는 이후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를 편찬할 만큼 현대사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박현채는 이 논문에서 “역사를 제대로 쓴다는 것은 바로 내일을 위한 역사적 작업”이라고 주장하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다. 그는 우선 한국 현대사 기술의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한국 현대사의 기술 방법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주체적 기술이어야 한다. 역사는 객관적 사실의 인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 그 배후에 내재하고 사실을 구체화시킨 인간 간의 상호 관계 위에 서는 역사적 흐름을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확인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인간의 상호 관계 위에서의 확인이고 그것 위에 서는 내일에의 제시여야 한다.

- 박현채,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 『역사⋅민족⋅민중』, 시안사, 1987, 18쪽


‘역사’에 대한 그의 인식은 상당히 정교하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주체적 기술’이라는 정의는 기능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고. “역사에 있어서 진보는 직접적 생산자의 보다 많은 경제 잉여의 귀속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광범한 민족 구성원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여 민족적 생활양식에 좇아 보다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박현채는 역사 기술론을 언급한 데 이어 자신의 역사관에 대한 인식도 피력한다. 그는 역사가 사실을 기초로 삼아야 하지만,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역사관에 의해 확인된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사실이 왜곡되거나 소멸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혁명가나 사상가들을 보면 역사를 보는 눈, 즉 사관에 의해 자신의 행동반경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사람의 사관은 곧 그의 실천성과 결부되는 것이다.

『역사⋅민족⋅민중』에 실린 「8⋅15의 사회경제적 의미」도 박현채의 민족 사상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다. ‘민족사에 있어서 8⋅15의 위상’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이, 그는 이 글에서 8⋅15에 독특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의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적 계기로 되는 8⋅15에 대한 역사적 인식 기준은 먼저 그 시기 한국 민족주의의 요구, 그리고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먼저 역사 인식의 기준이 민족주의적 요구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다. 8⋅15는 우리의 역사, 그것도 식민지 억업과의 관련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민족공동체의 정상적 실현에서의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민족적 요구는 한민족을 구성하는 제 계급⋅제 계층의 요구라는 프리즘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관철시킨다. 그것은 민족주의운동이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제 계급⋅제 계층의 생활양식 그 자체로 되는 민족적인 것의 보다 나은 생활의 충족을 위한 사회적 실천 운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박현채, 「8⋅15의 사회경제적 의미」, 『역사⋅민족⋅민중』, 시안사, 1987, 135쪽


『창작과 비평』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강제 정간되었다가 7년 만인 1988년 초에 전두환의 몰락과 함께 복간된다. 박현채는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을 특집으로 다른 복간호에 「분단 시대의 국가와 민족 문제」를 실었다.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지만, 이 무렵에 집필한 많은 글들 중 이 평론은 그의 대표작에 속한다. 이 평론은 1987년 10월 지방사회연구회 제2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것을 토대로 집필한 것이었다.

박현채는 자신의 글에서, 일제 식민지 통치 이후 전승되어온 민족적 과제에다가 8⋅15로 민족과 국가가 분단되면서 형성된 민족적 과제가 더해지면서 민족 토잉ㄹ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고 전제하면서 다음의 내용을 전개한다.

역사에 있어서 국가의 존재 양식은 1민족 1국가가 이상이고 민족국가는 바로 이와 같은 당위의 실현이다. 낮은 차원의 민족체는 민족적인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의 국가를 통합됨으로써 근대적인 민족체로서의 민족을 이룩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원 다른 민족체의 발전 단계에서 민족체와 국가 간의 괴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떠한 유형으로건 자본제화를 이룩하고 근대적인 민족으로서 자기를 완성한 한 민족이 분단에 의해 서로 다른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다. 1민족 2국가 또는 1민족 다국가 형태로 되는 분단 상황은 제2차 대전 후 독일, 베트남,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구체화되었다.

- 박현채, 「분단 시대의 국가와 민족 문제」, 『창작과 비평』, 1988년 봄, 241~242쪽


박현채는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국가와 민족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천착했다. 남북의 갈등 구조가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었고, 민주화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냉전을 부추기는 언론 및 지식인들이 극성을 부리는 상황이어서 이 문제는 박현채에게 더욱 절실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적인 것을 민족적 생활양식의 소산이자 그것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사회적 실천 및 생활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민족적인 것이란 사회적 인종공동체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되는 영토적⋅경제적 관계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박현채는 민족 문제를 경제 문제와 결부시키며 민족 문제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초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져온 경제구조에 대한 문제제기이면서 동시에 외국자본의 영향을 받는 경제 환경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다.

외국자본 지배의 확대 속에서 국민경제의 반쪽만의 양적 성장은 식민지 경제구조의 확대 재생산을 낳고 민족적 삶에 있어서 부정성을 더욱 확대⋅심화시키는 것이었다. 경제 잉여의 중층적 수탈 구조에서 오는 누출 메커니즘은 민중의 생활상의 빈곤은 물론 대의 채무를 누적시켰고 경제 밖의 민족적 삶에서 민주주의적인 기본권의 부정, 반민족⋅비민주적인 정치권력의 정당화, 그리고 사회⋅문화 쪽에서 민족적인 것의 상실과 매판적인 외래문화의 만연을 가져왔다.

- 박현채, 「분단 시대의 국가와 민족 문제」, 『창작과 비평』, 1988년 봄, 256쪽


당대의 경제구조를 분석한 박현채의 관심은 결국 민주화에 대한 열망 및 분단의 극복으로 모아진다. 정치권력 및 국가권력의 민주화를 민족 문제 해결의 열쇠로 바라보면서 민주화를 통한 분단의 극복을 희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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