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일 수 없으며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자 자유 이념의 주체다”
여성해방, 여성 자신의 해방 넘어 우리 모두의 인간성 회복하는 인류 진보의 일대사건
화순저널입력 : 2021. 09. 27(월) 18:24
존 스튜어트 밀 (1806~1873 경제학자)
<여성의 종속 The Subjection of Women>은 <자유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이 1869년 저술한 책이다. 당대의 여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여성에 대한 억압의 철폐와 해방을 주장했다.

<여성의 종속>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오늘의 관점에서는 이미 상식이 됐거나 다소 원론적인 기술에 그친다는 느낌도 들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긴급한 요구였을 것이다. 현재도 이 책이 진술하는 문제의식은 아직 유의미하며 논지 또한 그 본질적인 양상에서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저자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여성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권리 회복을 주창한 보기 드문 저작이 아닌가 싶다.

<여성의 종속>은 4개의 장과 번역자의 해제로 구성되었다.

제1장 ‘역사의 순리’는 남녀관계에서 남성 지배의 부도덕성과 불의를 지적하고 과거의 세기와 비교하여 역사가 필연적으로 여성들의 자유인구의 저변 확대와 해방의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밝힌다.

제2장 ‘왜곡된 결혼생활’은 결혼한 여성이 직면한 노예보다도 못한 가정생활을 고발한다. 남편의 폭력과 학대와 착취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여성들은 무력하다.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의 자유와 여성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법적 제도적 장치의 마련 그리고 독립적인 재산의 소유와 그 권리행사의 보장을 요구한다.

제3장 ‘역할과 직업의 평등’은 여성과 남성이 지적 능력에서 대등함을 밝히고 지적 차이는 성별에 따른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환경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에게 교육받을 권리의 확대와 직업선택의 자유를 요구하고 남성과 여성의 공정한 경쟁을 제안한다. 그와 함께 가장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인 투표권의 보장을 역설한다.

제4장 ‘여성해방이 남성도 구원한다’는 양성의 평등한 관계 회복은 남성에게도 평등의 정의를 가르쳐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높이며 그것은 곧 문명사회의 지표가 된다.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와 직업선택의 자유가 확대되면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능력과 에너지를 동력으로 해 인간사회를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가정에서도 배우자가 함께 높은 수준의 능력을 비슷하게 갖추게 되면 퇴보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부부가 서로 상호 침투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영혼과 정신을 고양시킨다. 남녀 양성이 상호 인정과 존중의 바탕 위에 자유를 확장할 때 인류는 인간다운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갈 수 있다는 얘기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일 수 없으며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므로 여성 역시 <자유론>에서 전개한 바와 같은 자유 이념의 주체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소신이 직조해낸 결과물이 바로 <여성의 종속>이 아닐까 한다.

예로부터 우리들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폄훼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교육받아 왔다. “여자는 사흘에 한 번씩 오뉴월 개 패듯이 패야 한다.”, “처갓집과 변소는 멀수록 좋다.”, “여자가 셋이면 접시가 깨진다.” 식의 발언들이 우리들의 귓바퀴에 태산처럼 쌓여 왔고, 또 대를 이어 재생산돼 온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폄훼는 이 땅의 시정잡배들의 입에서만 회자된 것이 아니고 동서고금 지위고하를 막론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주 무왕의 입을 통해 “새벽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雞之晨 惟家之索).”는 말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음을 증언하고 있고, 공자는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으며, 헤겔은 “여성은 물론 교양을 가질 수 있으나, 보편적인 것을 요구하는 수준 높은 학문이나 철학 그리고 어떤 종류의 예술 창작에는 적합하지 않다(Frauen können wohl gebildet sein, aber für die höheren Wissenschaften, die Philosophie und für gewisse Produktionen der Kunst, die ein Allgemeines fordern, sind sie nicht gemacht).”고 운운하며, 여성의 지적 능력을 평가절하한다.

찰스 디킨스가 지은 작품 속의 한 인물은 “혀; 그것은 여자의 것이 아닐 때 참 좋은 것이야(Tongue; well, that’s a very good thing when it ain’t a woman’s).”라고 발언하는데, ‘여성의 혀는 녹슬 일 없는 칼’이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아마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의 혀와 입을 누군가를 해코지하는 위험한 흉기거나 혹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작동하는 악담과 수다의 흉악한 소굴쯤으로 여겨왔지 않나 싶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어느 여성들의 황당하고 어이없는 죽음을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한 양반집 부인이 여종을 데리고 피난 중에 임진강 징파도(澄波渡)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배를 타려고 다투고 있었다. 부인 일행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뱃사람이 손을 내밀어 부인의 손을 잡고 배 위로 끌어올리려 했다. 그런데 이 부인은 대뜸 “내 손이 너의 손에 욕을 당했는데 내 어찌 살고자 하겠느냐(吾手辱於汝手. 吾何生爲).”면서 물에 갑자기 몸을 던졌다. 그러자 여종 또한 주인이 죽었는데 자신도 홀로 살 수 없다며 역시 물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엾은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주자학을 앓는 조선의 남성들이 강요한 정절 이데올로기와 주종관계의 폭력이 이 여성들을 허망한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고루하고 완고한 남성들은 반성은 커녕 이들을 ‘열녀’의 표상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이 만든 ‘여성 잔혹사’가 어찌 이뿐이겠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허초희라는 여성, 즉 허난설헌도 영설지재(詠雪之才)를 자부하던 천재적인 여성이었지만 손바닥만 한 숨 막히는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와 속 좁은 남성들의 억압적 질서와 횡포를 한탄하며 생의 한낮에 이르기도 전에 황망히 질식사하고 만 불행한 인물이었다.

서양도 예외는 아니다. 히파티아(서기 370-415년경)라는 여성은 알렉산드리아의 탁월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였다. 그러나 이 여성의 능력을 질시한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히파티아를 이단으로 몰았으며 결국 납치해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사지를 도려낸 후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 그의 저작들도 남김없이 폐기되고 말았다. 또한, 역사상 가장 두뇌가 뛰어난 여성이라는 일컬어지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150cm의 단신에 왼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안고 있었지만 1898년 베른슈타인과의 ‘수정주의 논쟁’, 1903년 레닌과의 ‘당 조직 논쟁’을 통해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가·선동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았으며 식을 줄 모르는 열정으로 억압받는 피압박 인민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1919년 1월 체포돼 재판도 없이 호송 트럭 위에서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발가벗겨져 리히텐슈타인 다리에서 란트베르 운하에 던져졌다가 5월 말이 되어서야 물 위로 떠올랐고, 6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땅에 묻혔다. 오, “극악무도한 야만(Ultimi barbarorum)!”

우리는 그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철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억압받고 굶주리는 자들을 위해 투쟁하며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다 굶어 죽은 시몬느 베이유, 그림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의와 평화를 갈망했던 케테 콜비츠, 생명이란 이해력을 초월한 기적임을 강조하면서 <침묵의 봄>을 고발하며 환경운동의 불을 지핀 레이첼 카슨, 강요되는 ‘여성’을 거부하고 주체적 인간을 선언하는 여성해방의 방아쇠를 당긴 베티 프리던과 <성의 정치학>을 통해 성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치고 자신 또한 기꺼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가슴을 꿰뚫는 해방의 총탄이 되고자 했던 케이트 밀레트, 자신의 선택에 의해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피임 시대를 선구적으로 열어간 마거릿 싱어, 자신은 관리 집안에서 자유롭게 자라났고 전족과 무관했지만 중국 당대의 악습인 전족의 폐지를 주장하고 여권신장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한 추근(秋瑾), 인민의 해방을 위해 한 치의 타협도 없이 싸우다 아무르 강변에서 총살당한 조선 여성 김 알렉산드라, 1920년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했던 안경신 의사, 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를 이끈 엘렌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와쿨 카르만, 과학계에도 마리 퀴리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의 저자 에밀리 뒤 샤틀레, 태양광선 스펙트럼 연구에 몰두해 태양의 구성 물질이 수소와 헬륨임을 밝혀낸 세실리아 페인, 주기율표 109번 마이트네륨의 주인공 리제 마이트너 등 수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자연과학 분야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그리고 자기희생의 땀과 고된 노동으로 척박한 이 땅의 어제와 오늘을 일궈온 누이들, 어머니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아무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단지 여성으로 만들어질 뿐이다(On ne nait pas femme: on le devient).”라는 유명한 경구를 통해 여성이 사회화 과정에서 남성에 의해 왜곡된 여성성을 내면화함으로써 <제2의 性>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아무도 운명적으로 ‘제2의 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성을 그 중심과 우위에 두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지배 권력이며 그것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학습 받고 체현하고 대를 이어 재생산하고 강화한다. 반면에 여성은 수동적인 여성성에 길들여진 결과 인간적인 자각의 기회를 잃고 남성의 식민지로서 자신의 처지를 마치 하늘이 내린 운명처럼 알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처럼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악습을 당연시하고 대물림하기도 한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할 때 여성의 비인간화는 물론 남성 또한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인간화 시킨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은 여성 자신의 해방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인류 진보의 일대 사건이 되지 않을까.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이 출간된 지 15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은 21세기의 대명천지이다. ‘전체성(全體性 Totalité)’의 논리와 의지에 “참된 삶은 부재한다.”, ‘존재론’이 축조한 알리바이의 극복을 위해 외재성의 ‘무한(無限 Infinite)’을 현시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도래를 기원한다.

<김다록 자유기고가>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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