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5)
화순저널입력 : 2021. 04. 23(금) 19:29
박현채는 중학생이 되면서 『자본론』을 비롯한 마르크스의 저술을 본격적으로 읽었다. 해방 당시에는 중학생들이 즐길 만한 오락 시설이나 서적이 없었기에,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남긴 다양한 일본 서적들이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회 분위기에 걸맞게 사회주의 서적이 학생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당연했다. 당시에 박현채를 비롯하여 많은 중학생들이 비밀 조직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에 참여했다. 민애청은 1947년 6월 청년층을 중심으로 결성된 남로당의 외곽단체였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김경추의 회고를 살펴보자.

나와 현채는 민애청 멤버였어. 중학생인 우리가 하는 일은 삐라 살포, 대자보 부착, 어두침침한 밤에 모여 기습적으로 소리 지르고 경찰오기 전에 도망가기, 뭐 그런 거였지. 현채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회주의 공부를 많이 했어. 항상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눈물이 많았지. 한마디로 의혈 소년이었어. 가슴에 조국애가 충만한.

- 김경추 「새 단계의 싸움에서 쓰는 격문」, 『코리아포커스』, 2005년 10월 5일.


광주서중은 호남의 명문으로 일제강점기 학생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다. 교장⋅교감을 비롯하여 많은 교사들이 진보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었고, 특히 광주서중 출신으로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했던 박재양은 사회주의 사상가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박현채도 이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4살이 된 박현채는 광주서중에 입학하자마자 독자적으로 동아리를 만들었고 민애청 학년위원(1학년 조직책)으로 선임되어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시국 관련 전단을 제작⋅배포하고 횃불 투쟁에 앞장섰다. 시쳇말로 ‘운동권’이 된 것이다.

광주서중에서 나는 1학년 C반이었다. 입학하여 나는 독자적으로 서클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상적인 민애청 조직과 직결되어 있던 친구들을 만나 비합법 조직과 연관을 갖는다. 이 시기에 송정석⋅김수명⋅이춘형⋅맹환계⋅홍기현⋅김희종⋅홍삼희⋅박정재⋅최은주 등이 우리 조직의 기간요원이 되어 조직을 이끌어간다. 우리 조직은 당시 재학생들의 70~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조직에 학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학년마다 약간 변화가 있었으나 나는 주로 조직을 담당했다. 우리가 민애청원으로서 한 주요한 투쟁은 일상적인 것을 제쳐놓고 큰 것으로는 인민공화국 수립 투쟁이었다. 우리는 선거 참여를 위한 연판장 투쟁부터 시작해서 시위, 봉화투쟁, 국기게양 투쟁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8쪽




어른 못지않은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소년


박현채가 광주서중에 입학하여 활동할 때 국정은 더욱 소연해졌다. 해방과 함께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이 발족시킨 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으로 인민위원회가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조직되었고, 언론과 출판의 90퍼센트 정도가 진보적 성향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탁 논쟁에 이어 실력행사가 벌어졌고, 1946년 6월 3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하는 이상만의 정읍발언이 있었다.

7월 25일에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여운형,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등 중도파에 의해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우익의 전국학생총연맹(학련)이 결성되었으며, 9월 7일에는 박헌영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9월 노동자 총파업에 이어 10월 1일 대구항쟁이 경상도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11월 23일에는 좌익 세력의 통합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결성되고, 12월 12일에는 미군정청 산하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되었다.

격동하는 시대에 남다르게 사회의식이 강했던 소년 박현채는 학교 공부보다 조직 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대학생과 유사한 수준의 활동을 하면서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학교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76점 수준’의 중상(中上) 정도였다.

이 시기에 박현채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헤겔의 변증법 이론을 꿰고 있으면서 어려운 질문을 해서 교사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친구들이 삼단논법을 몰랐던 시절에 박현채는 교사나 친구들에게 삼단논법을 구사하여 자기 발언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려 들었다. 그는 “고(故)로 결론은 이렇다”고 말하고는 했는데 그가 ‘고로’를 너무 빈번하게 써서 학우들 사이에 ‘박고로’란 별명이 붙었다.

이 시기 박현채에게는 조직의 관리 활동이 중심이었고 학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하지 않아도 기본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와해되면서 부담은 늘어만 갔다. 3학년 교위(광주서중학교위원회)가 해체되면서 이 조직까지 맡아야 했고, 학교는 그다지 잘 나가지 않았다. 꿈자리가 나쁘거나 하면 결석하기 일쑤였고, 여러 학생들에게 이런 분위기가 번져 나갔다.
화순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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