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1)
화순저널입력 : 2021. 03. 26(금) 18:38
평온한 시대에 살았다면 세계적인 경제학자가 되었을 터였다. 체제에 순응하면서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고 진리는 여럿일 수 있다는 셈법을 익혔다면, 남들처럼 부귀·권세를 누리는 데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반골이었던 그는 분단을 박차고, 서울대 교수 입성의 길을 박차고, 매판자본주의를 박차고, 그리고 불의한 기득권 세력과 박치기하면서 외롭게, 의롭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다 갔다.
많이 억울하고 분통 터지겠지만 ‘성공’한 자들의 회칠한 무덤이나 분(糞) 바른 이름보다 ‘민족경제학자 박현채’라는 정명(正名)을 남겼다.
- 김삼웅의 머리말 일부 발췌 -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은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출신이다. 소년 전사, 청년 학사, 중년 투사로, 온통 생애를 저항과 탐구와 자유분방함으로 살다가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김삼웅 저 『박현채 평전』을 화순저널에 연재하여, 선생의 넓고 깊은 생애와 깊고 넓은 학문의 광맥을 전국에 있는 화순저널 구독자는 물론 화순군민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편집자 주>



암울한 식민지 시대,
면서기의 아들로 태어나다



박현채는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의 산 중턱에 있는 할아버지 박화인의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경모는 광주서중을 졸업하고 면서기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대대로 이 지역에서 살아온 서민 출신이었다. 어머니 오순희는 감나무 식재(植栽)로 농장을 조성했던 유기업자 오재홍의 둘째 딸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5살에 결혼하여 1년 만에 박현채를 낳았다. 박현채 아래로 박귀채(큰딸), 박정자(둘째 딸), 박영채(둘째 아들, 큰집에서 양자로 입양), 박국채(셋째 아들), 박선은(셋째 딸), 박승채(넷째 아들), 박유채(넷째 딸), 박양희(막내 딸) 등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박현채가 태어난 1934년은 암울한 시대였다. 일제에 병탄된 지 24년이 되는 해로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노예와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4월 11일,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작쟁의를 해결하고자 조선농지령을 공포했다. 이는 친일지주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가혹하게 탄압하여 효과적으로 농민들을 수탈하려는 법령이었다. 또한 일본은 1931년 민주 침략을 강행한 후 이른바 ‘정책이민’을 실시하여 조선농민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5년에는 총독부가 조선 농민 80만 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기로 일본 척무성(拓務省)과 합의하면서 농촌 사회에 불안과 공포가 휘몰아쳤다.

1935년 9월 총독부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1936년 12월에는 이른바 ‘사상범’의 재범을 막기 위해 그 사상과 행동을 관찰한다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여 항일운동의 뿌리를 뽑고자 했다. 1937년 10월에는 조선인이 한민족의 성원이 아니라 일왕의 신민임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 모든 사람이 이를 암송하게 했다. 박현채는 이와 같이 암울하고 폭압적인 시대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면서기를 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크게 궁핍하진 않았지만 그의 삶은 다른 조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순탄치 않았다.

박현채가 태어난 화순군 동복면은 동쪽에 밤실산과 모후산 등 높은 산지가, 서쪽에는 동북천이 남류하는 유역에 좁은 평야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으며, 산간 마을에서는 한봉꿀이 생산되고 삼베가 유명했다. 유물⋅유적으로는 구암리에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으며, 연원리에 동복향교와 도원서원이 있다. 독상리에는 석등과 오씨비각이 있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독상리 마을에서 보낸 박형채는 5살 때 아버지가 곡성세무서에 취직하면서 전남 곡성으로 옮겨간다.

이후 1941년 8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그는 곡성 중앙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곡성 읍내에는 동악산과 형제봉 등 비교적 높은 산들이 있었으며, 순자강이 흘러 그 유역에 비옥한 평야가 있었다. 이 지역은 곡창지대였고 문화재로는 곡성향교, 단군전(檀君殿)과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도림시가 있다. 도림사는 주변 계곡을 따라 열여섯 굽이의 곡류가 넓은 반석 위를 흘러 경치가 아름답다. 박현채는 이곳에서 뛰어놀며 자랐다.

그사이 일제의 압박은 더욱 심해져 학교마다 일왕(日王)의 사진을 걸게 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매일 경배하도록 했다. 1938년 2월에는 만 17세 이상으로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특별지원병이 될 수 있는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이 실시되면서 징집이 강요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이 공포되면서 각급 학교에서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가 강요되고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만 했다.

박현채는 무슨 뜻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이 ‘서사’를 외우며 학교에 다녔다. 같은 해 4월 총독부는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했고, 7월에는 모든 교원과 공무원들에게 제복을 입게 했다. 어린 박현채는 일본군 옷과 비슷한 제복에 장화를 신고 칼을 찬 교사들에게 일본식 초등교육을 받았다. 총독부는 1939년 10월에 국민징용령을 공포해 국민을 강제 동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고, 그해 12월에는 소작료 통제령을 시행해 소작쟁의를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군국주의 파쇼 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조선 사회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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