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작가의 철학적· 신학적 고투, 인생관이 치열하게 녹아있는 작품
화순저널입력 : 2021. 03. 24(수) 14:19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1878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881년 그의 사후에 출간된 미완의 소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다섯 남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의 철학적· 신학적 고투와 인생관이 치열하게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카라마조프가의 가족사이자 파란만장한 인간군상에 관한 탐험이자 탐구이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지주이며 색욕과 물욕에 물든 방탕한 인물이다. 볼테르 등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과 무신론을 피상적으로 수용한 타락한 인텔리로 오직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미챠):표도르의 맏아들로 첫 부인 소생의 아들이다. 퇴역 장교로 순박하고 정직한 청년이었으나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방종한 생활에 빠진다. 아버지 살해라는 누명을 쓰고 재판에서 유죄를 받아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는 유형을 받아들이고 죄와 속죄의 고난을 통해 구원을 찾고자 한다.

이반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표도르의 둘째 아들로 둘째 부인 소생이다. 대학을 나온 수재이며 이성적이고 냉철한 청년으로 무신론자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그의 무신론은 이복동생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이반은 스메르 쟈꼬프를 정신적으로 교사했다는 죄책감을 갖는다.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알료샤): 표도르의 셋째 아들로 역시 둘째 부인의 소생이다. 수도원의 조시마 수사를 사사하고 있는 수도자로 순수한 영혼의 박애주의자이다. 러시아 정교의 ‘쏘르보르’(ssorbor)의 정신, 즉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와 사랑으로 결합하는 러시아적인 정신공동체의 관념을 체현한 인물이다. 둘째형 이반과 극시(劇詩) ‘대심문관’(大審問官)을 두고 대화한다.

스메르자코프(파벨 표도로비치): 표도르가 거지 여인과 사통해서 낳은 사생아로 간질병 환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하인이면서 요리사를 맡고 있다. 이반과 정신적 교류를 하지만 그 내부는 비열하고 잔꾀가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둘째 아들 이반이 아우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大審問官)대한 이야기이다.

이단 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에스파냐 세비야에 예수가 강림한다. 그것도 1500년 전, 삼십 삼년간 세상을 편력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민중 속에 나타난 것이다. ‘민중은 억누를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가 재림한 메시아인 것을 깨닫고 그에게로 향해가서 그를 에워싼다. 그때 성당 옆 광장을 지나가고 있던 아흔 살의 대심문관이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는 예수를 목격하게 된다. 친위대에게 명령하여 예수를 가둔 대심문관은 일백 명의 이교도가 화형당하여 그 타는 살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인 그 이튿날 ‘어둡고 뜨겁고 숨 막히는 세비야의 밤’에 예수와 단둘이 지하 감옥에서 얘기를 나누게 된다.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말한다.

“…그때 ‘너희 모두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라고 말한 건 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실은 그들이 직접 우리에게 자신들의 자유를 갖다 바쳤고… 그들이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남아있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신들의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로 갖다 바치면서 우리에게 ‘차라리 우리를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여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너는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다시금 반복하건데, 그것이 약하고 영원히 악덕하고 영원히 배은망덕한 인간 종족의 눈에 과연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있을까?…”

대심문관의 주장의 대강의 요지는 이렇다.

예수는 광야에서 기적·신비·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였지만,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신비·권위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 하지만 예수는 빵보다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의 탑을 세우고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다수에게 비로소 빵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의 이름을 빌어 겨우 현실의 질서를 만들어낸 지금, 예수가 재림하여 그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지상은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에 처할 수도 있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대심문관의 발언에서 권력의 속성과 세속화되고 권력화한 종교의 모습을 본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둘째 아들 이반의 무신론이야말로 실존주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신(神)이라는 대타자의 응시(凝視)가 사라진 지점에 인간은 먼저 원초적으로 존재한다. 존재는 본질에 앞서며( L’esxistence précéde l’essence )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유, 바로 그것이다. 결정론은 없다. 무엇인가 할 바를 지시하는 보편적인 윤리도 없다. 자유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인도 되거나 타자에게 위임될 수 없는 존재론적 토대이다. 또한 자기 자신과 세계에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유의 거절은 실존의 책임과 난관과 불안에서 도피하여 고정화·사물화· 화석화하는 곧 즉자화하고자 하는 '비열한 자들'(salauds)의 욕망이자 태도이다.

인간의 삶에서 빵의 무게와 의미 또한 가볍지 않다. 인간은 빵 만으로 살 순 없지만 그렇다고 빵 없이도 살 수 없다. 예로부터 중국 여러 고전들도 ‘民以食爲天’을 자주 언급하고 맹자도 기어이 無恒産 無恒心을 강조하지 않던가. 생존과 최소한의 존엄을 위하여 빵은 절대 불가결하다. 단지 빵을 지나치게 욕망하고 집착할 때 그것은 에리직톤의 위장처럼 위험하고 천박하며 자유를 경멸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정 이념을 염두에 두고 자유와 빵의 문제를 제기했을 수도 있지만 그 어떠한 종교도 어느 특정한 정치적 이념과 경제체제도 자유와 빵을 양립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오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자유와 빵을 더욱 비루하게 만든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카라마조프가의 남자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신, 신앙과 구원, 선과 악, 종교와 권력, 자유와 책임, 사랑과 증오 등이 점철하는 인간사의 파노라마를 유장하게 펼쳐 보여주는 웅장한 소설이다 .

<자유기고가 : 김다록>
화순저널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화순저널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