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심줄처럼 끈질기던 여름의 기세가 꺾이고 가을이 왔다. 그런데 올 가을 논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이맘때면 노란 낟알을 매단 야광연둣빛 나락의 물결이 넘실대기 마련인데 야광연둣빛이 아니라 붉은빛, 심한 곳은 생기 없는 누런빛이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일까?

궁금하던 차에 아이들을 학교에 실어다 주시는 택시 기사님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깨씨무늬병이라고 하던데요? 작년에는 벼멸구 때문에 난리였다면 올해는 이것 때문에 난리 났어요. 이 마을에도 많이 번졌네.”

멀리서 붉은빛으로 보이던 것이 사실은 벼 잎사귀에 번져가고 있는 작은 반점들의 빛깔이었던 것이다. 반점의 수가 늘어나 벼잎사귀를 다 점령해버리면 벼가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없어 양분을 먹지 못하고, 그러면 알곡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혹시나 싶어 우리 논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우리 논은 무사했다. 작년에 마을 대부분의 논들이 벼멸구 피해로 초토화되었을 때도 멀쩡하더니 이번에도 탈 없이 버텨주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가 무얼까? 대형 농기구로 땅을 갈지 않고, 볏짚 외에 다른 거름을 넣지도 않고, 병충해 방제약을 단 한 번도 안 치는데 어떻게 전염병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짐작을 해본다. 일반 논에 비해 벼 포기와 포기 사이가 넓어 통풍이 잘 돼서일 수도 있고, 넓은 면적 가득 한 종자만 심는 일반 논과 달리 논 두 배미에 8가지 토종벼를 섞어 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손모내기를 한 덕분인지도 모르고, 가끔씩 아이들과 논에 가서 잘 자라라고 고맙다고 노래를 불러준 게 위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이다.

짐작만 끌어안고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도대체 깨씨무늬병의 원인이 무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병을 영양 부족으로 보고 있었다. 헌데 나로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축분과 비료, 영양제까지… 요즘 벼들이 영양 과잉이라면 몰라도 부족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와중에 원인을 벼 뿌리 발육 상태에서 찾는 어떤 분의 글을 만났다. 깨씨무늬병에 걸린 벼를 뿌리째 뽑아보면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인데, 나에겐 그분의 견해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사실 뿌리는 개체를 넘어서는 연결망이다. 땅 속 미생물과의 연결망. 벼와 미생물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벼와 미생물이 공생의 네트워크를 형성했을 때 벼가 지닌 개체적 측면의 생명력도 더 강해진다. 벼가 자신의 광합성 산물인 양분을 미생물에게 나누어주면 미생물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땅 속 미량 원소와 벼의 면역계를 활성화시키는 화학 성분, 위험 요소를 알려주는 신호 같은 것을 보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뿌리가 튼튼하다는 건 미생물 이웃의 보호와 도움으로 그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걸 그대로 인간의 삶에 적용해서 나의 뿌리가 얼마나 다정하게 다른 생명들과 소통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고 재난이 일상화 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시대에, 그럴수록 흙과 뿌리를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청라
이양면의 귀농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