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긴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다
『박현채 평전』 제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3. 11(금) 19:36
치열하게 살아온 민족경제학자,
세상을 떠나다



박현채의 와병(臥病)은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해온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가슴 아픈 소식이었다. 그처럼 강건하고 의욕적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쓰러지다니, 믿기지 않았다. 처음 쓰러져 서울 보라매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언어가 어눌했으나 의식은 명료했다. 경희대 한방병원으로 옮겨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상대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래서 몇 달 뒤 퇴원하여 집에서 안정을 취하며 지냈다.

1995년 1월 초였습니다. 저는 해마다 정초에 선생님을 찾아뵙곤 했었는데 그 날따라 장담을 하셨습니다. “권형, 나 3월 강의에 나갈 거야!”라고 하시었지요. 집 마당에는 손잡고 걷기 운동할 나무 걸대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선생님 건강은 많이 좋아 보였습니다. 사모님께서 열심히 운동하실 것을 독려하셨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고맙다는 응석으로 “저 사람 때문에 나 못살겠어. 계속 운동을 시키고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 권오헌, 「당신께서 잠드신 세계엔 차별도 분단도 제국도 없겠지요」, 『아! 박현채』, 해밀, 2006, 19~20쪽


차츰 건강 상태가 좋아지자 주말이면 자신이 구술하고 『문화일보』 이미숙 기자가 정리하는 방식으로 자서전 작업 형식을 바꾸어 진행했다. 하지만 구술은 박현채가 다시 쓰러지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1994년 9월 그는 수유리에 있는 국립재활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투병 의지도 강해서 훌훌 털고 일어날 것으로 믿었던 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각계각층의 많은 인사들이 문병하여 재활원 간호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본인의 끈질긴 투병 노력과 가족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박현채는 현대 의학의 효험을 보지 못한 채 1995년 8월 17일 오후 1시경 서울 중구 정동 삼성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회갑을 갓 넘긴 61세의 나이에 파란에 찬 생을 접었다. 부인과 1남 3녀, 며느리와 사위들 그리고 12권의 옹골찬 저서를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가 병마에 시달리던 1994년 정윤정과 결혼했다. 생전에 자식들의 혼사를 다 마친 것이, 그나마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역할이라면 역할이었다. 다음은 박현채의 사망 관련 부고 기사다.

민족경제론을 주장한 대표적 민족경제학자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가 17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정동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1살. (……)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는 외세를 배제하고 민족 자립의 경제를 주창한 남한의 대표적 민족경제학자였다. 박 교수는 1970~19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 기간 동안 민주화운동가로, 빼어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고난을 겪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박 교수는 잠시 회복 기미를 보이다 1994년 문익환 목사 별세 소식을 듣고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긴 투병 생활을 해왔다.

그의 민족경제론은 196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종속적 발전의 길로 치닫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성과 건강한 민중적 회복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1970년대 유신독재 시기의 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중요한 실천적 가치를 제공했다. 그러는 한편 그의 이론은 이론적 완결성과 결함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특히 1980년대 중반 국가 독점자본주의론을 제기하면서 민족경제론과 이론적 통합에 나섰으나 그 성과에 대한 평가는 불투명한 상태다. 그의 이런 학문적 미완은 이제 후학들의 숙제로 남겨지게 됐다.

- 「박현채 씨 별세 어제 숙환으로」, 『한겨레』, 1995년 8월 18일


박현채와 함께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활동했던 정태인은 『한겨레21』의 기고문에서 몇 가지 일화와 비화를 소개했다.

박현채는 현실의 한국 자본주의를 여러 가지 자원을 동원해서 대단히 다양한 수준에서 비판해냈지만, 민중의 삶을 위한 경제학의 정립,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한 한걸음 전진은 그 난삽한 모든 글들에 관철된 하나의 목표였다.

그의 그 일관성은 그가 나에게 되풀이해서 들려준 에피소드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중국혁명기에 어느 오지의 산골에 농부 출신 당원이 있었는데 중국 내전의 그 혼란 속에서 완전히 상부와 선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10년이 훨씬 지난 뒤 당 간부가 우연히 이 지역에 들렀을 때 그가 아직도 당에서 준 과업을 수행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어리석기까지 한 농부야말로 바로 박현채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의 아름다움에 신경 쓸 여유 없이 간행된 조악한 번역서, 혹은 일본말로 된 난해한 일본 책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그가 좌파 독서클럽을 조직한 것이 국민학교 3학년, 그리고 집에서 발견된 『맑스주의의 기원』 때문에 전남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는 사실은, 왜 그가 대표작 『민족경제론』으로부터 최후로 간행된 『민족경제론의 기초 이론』에 이르기까지 난해함을 넘어 조악한 글쓰기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그는 그 엄혹한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독재정권의 감시 대상이었다. ‘문민시대’의 바로 요 몇 달 전에,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마포의 아파트로 안기부(혹은 치안본부) 요원이, 그것도 새벽 2시에 ‘급습’했다는 것은 그 이전 그가 겪어야 했던 고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글은 마르크스 대신에 리스트를 끼워 넣어야 했고,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게 분류되어 있는 일본학자를 인용해야 했다. 더구나 그의 한계와 더불어 학계의 낮은 수준 때문에 그의 글 자체가 바로 그 ‘노예의 언어’에 오염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글이 어떠한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추출해내는 데 큰 어려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글은 조금의 에누리도 없는 민중을 위한 경제학이고 일관되게 노동계급을 위한 글임에 틀림없다.

민족경제론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확장되어야 한다. 나는 박현채의 일관된 사상과 실천, 그 내적 긴장 속에서 민족경제론의 결함과 더불어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긴장을 통해서만 민족경제론을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긴장 자체는 민족경제론이 시간과 공간을 향해 열려 있는 체계라는 증거가 된다.

- 정태인, 「민족경제론, 한 시대를 마감하다」, 『한겨레21』, 1995년 8월 24일(제74호)


영결식은 8월 20일 각계 인사들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여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크리스천인 부인의 뜻에 따라 교회 공동묘지인 천안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개판’ 모임을 함께했고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이해동 목사 등 4명이 조사를 했다.

일제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해방 뒤 한국의 지식인 군상은 지극히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다. 이승만 시대의 ‘만송족’, 박정희 시대의 ‘유신족’, 전두환 시대의 ‘땡전족’, 김영삼 시대의 ‘YS 장학족’, 이명박 시대의 ‘뉴라이트족’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권력 지향성을 보였다. 시대마다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지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주류에는 역시 외세 지향적이고 친독재적이며 반민주적인 어용 지식인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박현채는 속물 지식인들이 판치는 지식인 사회에서 바른 성정과 꼿꼿한 자존감으로 불의와는 한 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비타협적인 성격으로 인해 고립이 따랐으나, 그의 주위에는 시대의 양심이라 일컫는 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화순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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