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식인, '민봉(民峯)' 박현채
『박현채 평전』 제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3. 25(금) 18:19
후진에 남긴
‘민봉학’의 과제들



박현채의 오랜 지우였던 언론인 김중배는 다음과 같이 고인을 기린다.

자기는 역사의 고비에서 자기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 또는 역사의 진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피해서는 안 된다, 항상 맞서서 이것을 이겨내야 된다고 확신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글쓰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이론을 전개하는,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겠죠. 그러나 그것을 발표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피하지 않고, 언제나 온몸으로 맞서왔던 사람이고, 온몸으로 글을 쓰고, 온몸으로 행동하고, 온몸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민족과 민중을 위해서 그리고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 고뇌하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행동해왔던 지식인이면서, 나는 전사라는 표현도 한때 했습니다. 전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김중배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421~423쪽


박현채는 1988년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나온 이문영 교수 회갑기념논문집 『시대와 지성』에 수록한, 같은 제목으로 쓴 글에서 “진정한 지성은 역사에서의 충실을 위한 현실적인 반역 행위와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억압과 소외에 의해 규정짓는다”라고 말하며 행동하는 지성론을 폈다. 그는 이론만의 지성론을 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고 실천했다. 이어서 그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민족적 과제는 민족적 자주, 민주주의, 민족적 통일, 민중적 생존권의 확립”이라고 선언했다.

1980년대의 주장이지만 오늘에도 다르지 않는 시대적 가치이자 소명이라 하겠다. 박현채의 삶과 철학 및 사상의 알갱이는 여기에 담겼다. 순수하고 질박하며 가식 없었던 인간성, 그리고 학문적 열정과 성실성, 여기에 넓은 도량과 깊은 웅심, 굳은 의지는 지고의 가치인 ‘민족’을 향한 충분조건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바로 박현채는 평생 자서전, 논문, 평론, 시론, 대담, 토론, 편지, 에세이 등 총 1368편의 글을 남겼다. 1960년대 26세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여 1993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33년 동안의 연구 성과로, 메모로만 남아 있는 강연회나 강의 자료들은 뺀 개수다. 1964년~1965년에 2년 동안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한 해 평균 45편씩 쓴 셈이다. 특히 1980년대에는 엄청난 글을 쏟아냈다. ‘논문 생산 공장’이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정가와 관변을 오가는 저명한 학자 중에는 변변한 저서 한 권 남기지 않은 ‘불임(不姙)’의 지식인들이 많은 한국 현실에서, 그토록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그처럼 많은 글을 생산한 지식인도 흔치 않다.

박현채는 양날의 칼이 된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 구도 속에서 흉포한 권력과 외래 사조에 명줄을 건 속물주의 지식인들이 판치는 시대를 힘겹게 살았다. 가슴에 뜨거운 용광로를 품고 끊임없이 담금질을 통해 민족경제를 연마했으며, 그것을 인간 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민족사⋅민중사의 긴 생명력을 지닌 민족경제론으로 정립했다.

민족⋅민주⋅민중⋅자주⋅민생의 담론이 담긴 민족경제론을 자신의 실천 가지로 삼은 박현채는, 전사이면서 학자였다. 기존의 상식과 상투성을 벗어던지고, 맨살로 역사의 현장, 지성의 광장에 우뚝 섰다. 그가 서울대 재학 시절 스스로에게 붙였던 ‘민봉(民峯)’이라는 호를 달아, 그가 이룬 성과를 ‘민봉학(民峯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는 후학들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박현채가 살아 있다면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파산에 이어 미국 세계무역기구와 펜타곤 건물이 붕괴된 9⋅11사태, 그리고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라는 전 지구적인 시위와 2012년 다보스 포럼의 핵심 화두가 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제3의 길’을 내놓았을까? 이것 역시 후학들의 몫이겠다.
화순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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