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박현채 평전』 제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3. 04(금) 17:49
자서전 집필,
그의 말년을 갉아먹다



야생초를 실내에 옮겨 심으면 본래의 싱싱함을 잃는다. 바다의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야생마와 같았던 박현채는 제도권에 잘 적응하면서 활기찬 광주 생활을 이어갔다.

지리산과 백아산, 무등산을 가끔 등반하고 망월동 5⋅18공동묘소도 자주 찾았다. 관절염 증세가 나타났으나 크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의사가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 술도 맘 맞는 벗들과 어울리면 ‘이번만’ 마시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임동규는 “광주에서 아파트로 찾아뵙게 되면 그리도 기분 좋아하시면서 술도 한잔 하시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박현채는 “워낙 마님께서 엄중 금주령을 내렸지만 말야.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 한잔 안 할 수 있어?”라고 하며 ‘이번만’ 술자리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박현채는 술판이 흥겨워지면 「보리밭」, 「모닥불」, 「비목」 등을 즐겨 불렀다. 그의 노래는 때로는 너무 진지해서 듣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박현채는 벗들과 어울려 술에 취하거나 산에 올랐을 때 가끔 ‘산사람’ 시절 불렀던 「부용가」를 구슬프고 처연하게 부르곤 했다. 이는 1950년대 전남 지역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의 작품이라 한다.

부용산 5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현채는 1992년 대학 강의를 비롯하여 한국사회연구소 창립, 셋째 딸 혼사, 일본 방문 등으로 매우 분망했으나 그 와중에도 무게 있는 몇 편의 평론과 시론을 썼다.

조희연과의 연속 작업인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펴내면서, 「80년대 민족민주운동에서 5⋅18광주민주항쟁의 의의와 역할」을 집필해 이 책에 수록했다. 이어서 「사회주의-자본주의에 후속되는 단계」를 『창작과 비평』에, 그리고 「위기 시대의 그리운 사람: 민족경제론과 박준옥 교장 선생님」을 『길을 찾는 사람들』에 기고했다. 언론 개혁을 주장하며 「단순한 현황 보도 넘어 민족적 당위 제시해야」라는 평론을 『저널리즘』 26호에 쓰기도 했다.

1993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등 분주한 생활 속에서도 창작의 열정만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병마도 펜을 잡을 때는 육신을 떠나는 듯했다.

하지만 박현채의 육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과제가 몇 가지 있었다. 민족경제론의 논리를 갱신해야 한다는 소장 학자들의 요청과 창작과비평사로부터 소년 시절 이래의 저항 활동을 비롯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삶에 대한 자서전을 집필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박현채는 광주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자서전 집필을 시작했다. 출생에서 입산 그리고 ‘산 생활’의 활동상을 써나갔다. 빨치산 활동을 회고하면서는 스스로 격정에 빠져서 눈물을 쏟느라 집필이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현채의 건강이 더욱 나빠지자 가까이에서 그의 구술을 정리하며 자서전 집필을 거들었던 이미숙은 “부인 김희숙 여사는 선생이 한밤중에 워드프로세서를 두드리다 몇 시간씩 흐느끼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했다”고 증언한다.

지인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말처럼 자서전 집필은 ‘박현채 말년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그의 심신을 갉아먹는 노역이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평생 자신이 견지해온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이었을 것이고, 정신적⋅육체적으로 의욕과 생기를 저하시켰을 것이다. 서울과 광주를 1주일에 서너 차례 오간 강행군도 무리가 되었다. 지인들이 항공기 이용을 제안했으나 비용 때문에 기차나 버스를 이용했다.

박현채는 1993년 8월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 자택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하지만 신체가 강건하고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고혈압과 합병증에도 별로 개의치 않고 활동을 계속했다. 지리산 ‘산 생활’ 시절의 한 친구가 박현채의 손금을 보더니 “현재야! 너는 18세 때 죽지 않으면 81세 때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81세가 자신의 정명(定命)이라고 자부했던 터였다. 이돈명의 증언이다.

그때 나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오다가다 박현채가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여러 가지로 그런 얘기〔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건강을 해쳤다는 얘기-필자〕가 당시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다가다 병이 난 것이 아니라, 워낙 ○○○〔방송 과정에서 삭제된 부분, 이하 동일-필자〕 생활에 비추면 그 사람이 고뇌에 차고, 항상 분노와 희열이 뒤죽박죽 얽혀서, 받은 격노의 분을 견딜 수 없는 그런 생활이고, 반은 그 반작용으로 ○○○ 세상, 그런데 그 조화가 제대로 취해지지 못한 가운데에서 일이 차근차근 좀 생겨서 그것이 악화되어서 그 병이 생기지 않았는가. (……)

그것은 내가 제일 일찍 알았어요. 실제는 그 사람이 병 있는 사실을. 그런데 그렇게 해서 가끔 나한테 오고 그러는데 내가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아무리 가까워도 물어볼 수 없어. ○○○ 본인은 그걸 전혀 못 느꼈어요. 참 아까운 사람이 그렇게 갔습니다.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이돈명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5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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