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첫 해외 방문지로 삼다
『박현채 평전』 제10장 자서전 집필을 뒤로한 채 영면하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2. 25(금) 20:00
해외 여행길 올라
중국 견문록 쓰기도



박현채는 대학교수로 제도권에 편입하면서 뒤늦게나마 다소 안정되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진드기처럼 따라붙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는가 하면, 형사가 찾아와 동향 보고서에 날인하라는 압박도 줄어들었다. 중고였지만 자가용은 출퇴근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삶이 안정된 탓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전과는 달리 ‘일탈’하는 모습도 보였다. 광주의 ‘우편향’ 인사들과 가끔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이들과 ‘백인회’를 창립하여 지역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광주 사회에서 박현채를 아끼던 동료들 사이에 ‘변절’ 운운하는 험담이 나돌았다. ‘옥중 동기’이기도 한 이강의 회고다.

내가 박현채 교수를 댁에서 만나서 백인회에 대한 여론의 문제제기를 전했다.

박현채: 송기숙 교수도 똑같이 그렇게 지껄이더냐?
이강: 송기숙 교수는 물론 모든 교수들이 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한번쯤 만나서 설명을 하시면 어떨까요?
박현채: 이강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강: 교수님께서는 뭔가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민주화운동 교수 분들에게 오해를 남기시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박현채: 광주는 모든 사람이 복잡하게 다 얽혀 있는 곳이다. 여기서 박현채가 매번 민주화운동 교수들과만 어울리면 그들이 어떻게 일을 계속할 것이냐?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그들과 함께 움직이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모두 함께 망한다. 나는 어차피 찍혀 있으니까 광주에서는 언제나 우익들과 어울려야만 나에 대한 감시로 인하여 그들이 운동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을 것 아니냐? 여러 교수들은 물론 송기숙이 보고 앞으로도 계속 틈만 나면 박현채 비판을 계속 떠들도록 방치, 또는 오히려 유인하여라. 이것이 결국 박현채도 살고 송기숙이나 다른 교수도 살길이며 이강 너도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니 앞으로 그대로 방치하여라.

아아!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의 살신성인인가!

- 이강, 「아! 민봉! 위대한 박현채」, 『아! 박현채』, 해밀, 2006, 186~187쪽


박현채는 광주 시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산을 오르고 토론하고 글을 쓰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즐겼다. 모두 민주화 덕택이었다. 하지만 박현채의 사회 활동과 집필은 1993년 8월로 사실상 마무리된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재활 치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만 60세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7개월쯤 전, 박현채는 조정래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영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등 서유럽을 여행했다. 한 해 전에 잠깐 일본에 다녀오긴 했지만 유럽 쪽은 처음이었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그나마 해외여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1991년 3월에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난생처음의 해외여행이었다. 중국 여행은 민족문학작가회의 기관지인 『문학』 창간호에 그 기록을 남겼다. 홍콩-베이징-시안(西安)-상하이 코스로 일주일간이었다. 중국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애를 많이 태웠다. 노태우 정부가 여권과 비자 신청에 이것저것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조선대 교수라는 타이틀 덕분에 출국이 가능했다.

베이징에서는 자금성⋅베이징 대학교⋅만리장성⋅톈안먼(天安門) 광장⋅마오쩌둥기념관⋅인민대표자대회당 등을 둘러보고, 베이징 교외의 인민공사를 찾아 운영 실태를 살폈다. 베이징에서 3박 4일 관광을 마친 후, 시안으로 가서 진시황릉과 병마총을 보고 시안사변의 현장, 8로군 군정서 터, 시안 교외 린퉁(臨潼) 현에 있는 화칭츠(華淸池) 등을 둘러봤다.

다음 상하이로 가서 기차를 타고 구이린(桂林)으로 들어가 자연 경관을 구경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 임시정부청사와 임정 요인들이 묻힌 공원묘지, 윤봉길 의사의 의거지 홍커우공원(虹口公園)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홍콩으로 가서 김포행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본토에는 국적기가 취항하지 않아 홍콩을 거쳐야만 중국 방문이 가능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박현채가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첫 해외 방문지로 택한 것은, 역사 고적과 수려한 관광지를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 반세기에 이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실태를 주마간산 격으로라도 보고 싶었던 ‘사회과학적’ 탐구심 때문이었다. 언어의 제약, 접촉 범위의 협소함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나름으로 중국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며 그는 자신의 소견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경제적 상황은 다른 나라에 뒤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의식은 해결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상품은 시장에 가득했다. 해마다 단경기에 수백만 또는 수천만이 죽어갔던 지난날의 중국의 비극은 이제 끝난 것이다.

둘째, 사기업의 허용은 퇴폐적 자본주의 문화의 침투와 함께 인민들의 사회주의적 윤리 의식을 좀먹고 있다. 인민들이 이중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데, 큰 것은 대개 유흥업소와 서비스업이다. 육체노동자에 비해 훨씬 작은 지식인들의 임금 격차로 지식인들이 불평불만 세력으로 진화되고 있다.

셋째, 개방경제의 실시로 소외가 심화되고 있다. 관광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개방 지역에서는 호텔 시설 등 외부 경제 시설의 대폭적 확충이 있었다. 내국인 중 일부 소득 계층에만 개방함으로써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원칙에 비추어 조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넷째, 부분적인 시장경제 원리가 도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영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 사회적 소유의 기본 형태는 공동적 소유 또는 국가적 소유 형태가 아니라는 데서 중국 사회주의에서 소비재 부문에 있어서 국가적 소유 형태는 완화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개방경제 체제가 갖는 부정적 측면이다. 부분적인 사경영의 도입과 허용은 직업의 이중화에 의해 많은 사람을 이중 직업자로 만들면서 직업윤리의 부재를 일반화시켰다. 일부 직업자의 치부는 사회적 부패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여섯째, 대만 정책은 상호 접촉의 확대를 위한 정책이 두드러진다. 관광 투자는 대만과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한 조국 통일을 위한 투자의 일환이라는 데 특징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분단에서 오는 이질감의 극복을 보다 더한 상호 접촉에서 극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곱째,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치는 부동의 것이다.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이 이만한 위치를 차지한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족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기게 했다.

- 박현채, 「중국 기행」, 『문학』, 1991년 창간호, 279~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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