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지성(呱呱之聲) 울리며 쏟아져 나온 무크지와 계간지
『박현채 평전』 8장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화순저널입력 : 2021. 12. 24(금) 19:36
저항적 지식인들,
출판계로 몰려들다



1987년의 6월항쟁은 한국의 정치 지형뿐만 아니라 지식인을 비롯한 국민들의 의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면, 4월혁명 이래 축적되어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부분적으로는 격렬함을 띠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민족주의의 열기가 점화된 상태였다.

이 같은 열기가 가장 뜨겁게 달아오른 곳이 바로 출판계였다. 유신과 5공 체제에서 순화된 제도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출판계는 언론 및 학술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반독재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다수의 젊은 엘리트들이 출판계로 유입되었고, 출판계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광장이 되었다.

여러 출판사들은 변혁의 물결을 타고 경쟁적으로 무크지와 계간지를 창간했다. 『역사비평』, 『사회비평』, 『사회와 사상』, 『노동문학』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1987~1988년 사이에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리고 세상에 나왔다. 이들 잡지에서는 한결같이 진보적 담론을 기획 특집으로 엮었다. 여기에 진보적 지식인들이 필자로 동원되었다. 박현채는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는 많은 글들을 집필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인재가 자기 전문 분야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수많은 학자, 예술가, 작가들이 나치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미국에 정착하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에 매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당시에 미국은 학문의 측면에서 유럽에 크게 뒤진 상태였는데, 이들의 참여로 미국의 학문이 유럽의 그것과 비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다. 반면 각계의 유망한 인재들이 유출된 독일에서는 히틀러 집권 기간에 문화⋅예술⋅학문적으로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뒤처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히틀러는 미국이 학술 기반을 넓히고 수준을 높이는 데 큰 공을 세운 셈이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와 전두환의 5공 체제에서는 수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사회 활동을 억압당했다. 관제와 어용만이 활개치고, 아첨하는 이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날뛰었다. 그만큼 지성과 양식이 증발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는 민중의 힘으로 반독재⋅민주화가 추진되면서 박현채도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많아지고 강연 횟수도 늘어났다.

1986년에는 집안에 겹경사가 있었다. 6월에 둘째 딸이 이경호와 결혼했고 이어서 7월에는 장녀가 이규호와 결혼하여, 박현채는 한 해에 사위를 두 명이나 맞게 되었다. 가장이 변변한 직장도 없고 걸핏하면 수사관에 쫓기는 등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자녀들이 기죽지 않고 잘 자라서 짝을 찾아 결혼한 것은 여간 대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화가 진척되고 각종 진보 매체가 창간되면서 박현채의 일상은 다시 바빠졌다. 원고 청탁을 받아 글 쓰는 시간이 늘었다. 자택에서 글을 쓰기도 했지만, 글의 주된 ‘생산 공장’은 그가 매일 출근한 서울 “중부경찰서 맞은 편 골목길, 움푹 들어간 곳의 작은 사무실”이었다. ‘국민경제연구소’란 간판을 걸어놓았지만 비좁은 공간이었다. 다음의 글은 이 무렵 박현채의 연구실에 종종 드나들었던 고은희 회고다.

그의 시내 연구소는 이런 집안의 서재와는 영 딴판이다. 어디 한 군데 발을 디딜 데 없이 서적과 자료가 쌓여 있다. 한편의 흐리멍덩한 유리창 말고는 3면 벽의 천장까지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것들은 물론 경제⋅정치에 관한 책들이 주종을 이룬다. 또한 구하기 어려운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정국의 자료들도 적지 않다. 그뿐 아니다. 그는 그의 전공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듯 광범위한 분야의 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연구실 광경은 한마디로 혼돈 그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어?”하고 물으면 그는 태연하다. “응. 환히 알고 있어”라고.

- 고은, 「난을 기르는 박현채」, 『민족경제론과 한국경제』, 창작과비평사, 1995, 428쪽


박현채는 1986년 그동안 쓴 경제 관련 글들을 모아 일월서각에서 『한국경제구조론』을 발행했다. 『민족경제론』만큼은 아니었으나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의 책은 문장이 난삽하고 내용이 어렵긴 했지만 일정한 독자층이 형성되어서 꾸준히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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