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4)
화순저널입력 : 2021. 04. 16(금) 18:48
박현채의 아버지는 1946년 광주 남동에 집을 사서 이사했으나 곧 목포세무서로 전근한다. 그래서 박현채는 외삼촌, 이모부와 함께 남동 집에서 지내면서 학교에 다녔다. 처음에는 셋이 기거했으나, 곧 삼촌 조주순과 매부 김재옥이 집으로 들어왔다. 삼촌과 매부가 정당활동을 했기에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박현채는 이들 틈에 끼어 시국담을 듣고 토론에 참여하는 등 ‘소년 투사’로 성장했다. 그의 집은 담론의 광장이었다. 이 무렵 박현채는 삶의 방향과 진로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격동적인 시기에 어떻게 하면 역사와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갈지 고민한 것이다.


나는 민족적 참여의 시기에 견결히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어느 쪽으로 참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의 이와 같은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화탄〔화순탄광-필자〕 노동자의 현실 참여였다. 광주와 화탄은 약 30리 거리였으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화탄 노동자들은 도보로 광주 행사에 참여했다. 우익 측인 독립촉성회 노인들의 참여와 대비하여 그들의 강건한 현실 참여는 모든 사람들을 격하게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나는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민족의 운명을 나약한 늙은이들에게 내맡기기보다는 젊은 생산계급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4~35쪽


소년 박현채의 시대 인식에는 남다른 측면이 있었다. 공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남로당과 관계를 맺었던 아버지, 그리고 이념가인 친척들 곁에서 성장하면서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애정을 갖게 되고 그쪽으로 자신의 장래를 설계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수한 인재들이 거의 사무직을 택하는 데 비해 박현채는 어린 나이에도 생산직 노동을 선호했다.

그는 생산활동을 하는 계급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역사의 진보 편에 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간에 읽은 관념적 영웅전의 결론으로서 노동자의 편을 택했던 것이다. 이런 고민 가운데 박현채는 좌퐈서적들을 탐독하기 시작했으며 마르크스주의 글 읽기 운동에 참여한다. 이런 선택은 학교에서의 독서회 활동으로 이어진다.




독서회를 조직,
사회주의 서적에 심취하다



일제강점기의 청년들은 독서회를 조직, 이를 발판 삼아 독립정신과 애국심을 키우면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의 학생⋅노동자들 역시 유신 체제와 5공의 폭압 속에서도 독서회를 만들어 각종 이념 서적을 읽으면서 통일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벌여 나갔다. 박현채는 10대 초반에 독서회에 들어가 많은 책을 읽으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 초등학교에도 진보적 활동 조직은 있었다. 사로계〔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진 좌익 계열의 정당-필자〕였지만 최충근 선생은 학교 안에서 독서회 서클을 지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무등산 언저리에 모여 독서회 활동을 했다. 내가 에드거 스노의 『붉은 중국』〔『중국의 붉은 별』-필자〕을 접하게 된 것도 이 모임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관계 서적의 남독으로 되면서 나의 정치적 성향을 규정하게 된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5쪽


박현채는 전학생인데도 이 학교 졸업식 때 학생 대표로 송사(送辭)를 읽었고, 학생자치위원장에 선임되어 동맹휴학을 이끌 만큼 리더십이 있었다. 이 시기 학원가의 이슈는 국대안 반대운동이었다. 이는 1946년 9월 국립서울대학교의 창설 작업이 강행되자 이에 반대해 일어난 동맹휴학운동으로, 지방의 초⋅중⋅고등학교까지 파급되었다. 원래 학교의 깨진 유리 값을 변상한다는 명목으로 후원회비가 대폭 인상되자 동맹휴학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에 국대안 반대운동까지 결부되었다. 박현채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쓸 경우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만 주동 학생들의 중학교 진학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교장의 말을 듣고, 학교 휘원회의 양보를 끌어내어 교내 문제를 타결하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박현채는 생산적 활동을 하는 삶을 살고자 1947년 광주공업학교에 지망했다. 하지만 적록색맹으로 신체검사에서 불합격되어 인문계열로 아버지의 모교인 광주서중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그런데 입학식도 하기 전에 집안에 일이 생긴다. 아버지가 공무원들의 파업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면서 박현채의 자취집에 경찰이 들이닥쳐 수색을 한 것이다.

『맑스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이 압수되고 박현채는 광주의 전남경찰국에 잡혀갔다. 책을 압수하게 된 경로는 밝혀졌으나 공책에 그려놓은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김구(金九, 1876~1949)의 초상, 특히 이승만 초상에 써놓은 ‘매국노’라는 내용 때문에 그는 경찰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사찰과장은 이승만의 매국 행위를 증명하라며 구타를 거듭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밤늦게 풀려났으나 이때의 기억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았다. 이 일은 이후 거듭되는 투옥과 연행의 시발이 되었다. 해방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념 서적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낙서 때문에 고문당한 이들 중에 박현채보다 어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그는 조숙했고, 일찍부터 권력의 박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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