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1장 격동의 시대, ‘소년 투사’로 성장하다 (2)
화순저널입력 : 2021. 04. 02(금) 19:25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과 쌀 공출령이 강제되면서, 이제는 조상 전래의 성씨도 못 쓰고 쌀밥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암울한 시대에서 더욱 캄캄한 암흑 시대로 들어갔다. 1941년 12월에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의 군수창고가 되었고, 조선인은 한낱 군수품으로 전락했다. 사정은 도시나 농촌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어린 박현채마저 근로 작업에 동원되었다. 군수용으로 사용되는 마초와 송진 채취 작업에 나서는 일이 많았고, 군량미로 쌀을 빼앗기면 뒷산에서 나물을 채취하여 부족한 식량을 채웠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3쪽



1944년 2학기 말에 박현채의 아버지가 광주로 전근하면서 가족들은 광주 시내 누문동으로 이사를 했다. 박현채는 친척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수창국민학교로 전학하여 처음으로 도시 생활을 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10살 때까지는 시골 벽지에서 살다가 도시 학교로 전학한 것이다. 유년 시절의 잦은 이사와 전학은 아이들에게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변화를 안겨준다. 박현채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비교적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가는 곳마다 잘 어울리고 적응하는 편이었다. 그만큼 보고 듣는 정보량도 많았고 사귀는 친구들도 다양해졌다.

당시 이런 박현채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은 박헌영(朴憲永, 1900~1955)과 함께 활동한 이모부와 사회주의운동을 한 당숙 등이다. 박현채는 이들을 통해 민족해방운동과 사휘주의 이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가 체포되었으나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 국내 진입을 시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출감 뒤에는 전남 광주 백운동의 벽돌 공장 인부로 위장하여 은신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당시 청소년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일제 말기의 폭압 속에서도 국내 곳곳에서 항일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농민⋅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민족해방 투쟁이 겹쳐진 저항운동이고,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도 지속되었다. 항일운동의 중심은 대부분 농민⋅노동운동과 연계되었다. 우파 계열은 1937년 6월부터 181명의 민족주의 계열 지식인들을 검거하여 탄압한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전향하거나 활동을 접었다. 이로써 국내 우파 진영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멸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항일운동의 명맥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잇게 되었다.

박현채는 12살이 되는 해에 해방을 맞았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쓰고, 집에서는 조선말을 사용하는 ‘이중 언어’ 세대의 해방이었다. 반쪽 모국어를 쓰면서 분노를 삭이지 않았던 그로서는 해방으로 우리말을 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즐거웠다. 그렇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사용했던 일본어는 성장해서도 입에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글에도 일본식 어투가 남아 있었다.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후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되고 곳곳에 자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국민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박현채는 1946년 수창국민학교 6학년 때 학생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뽑혔다. 아버지가 가져온 신문과 여러 책들을 통해 일찍부터 사회의식에 눈떴던 그는 독서회에 가입했고, 수창국민학교 교사였던 최충근의 지도하에 에드거 스노(Edgar snow, 1905~1972)의 『중국의 붉은 별』 등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 13살 소년으로는 보기 드문 조숙함과 폭넓은 독서열이었다. 이 시절 박현채는 『삼국지』를 읽은 후 동급생 2명과 의형제를 맺고 앞으로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나는 수창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김희종, 김영배, 민경기, 박석운, 박두순, 모리 히로시 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이들과의 인생의 기록을 갖게 됐다. 그 가운데서도 석운과 모리 히로시는 결의형제를 맺는다. 그러나 우리의 결의형제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우리는 국민학교인 수창 4학년 시절에 『삼국지』의 고사에 따라 결의형제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이름의 일본음을 따서 신고(일본음 모리 히로시), 신겡(아라이 겐사이. 박현채), 신샤구(아라이 샤구운, 박석운), 삼인의 결의형제를 맺는 것이다. 해방 후에 알게 됐지만 일본말 모리 히로시는 마산의 항일 공산주의자 김형직의 아들이었고, 연안 독립동맹 김명시의 조카였다. 그는 1946~1947년경에 소식 없이 광주를 떠났다. 박석운은 여수제주연락선 경주호 납북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은 초등학교만이 아니라 중학 그리고 인생 역정에서 나의 길이 그러하듯 비극으로 끝난 많은 사람을 갖는다.

- 박현채, 「육필 회고록」, 『박현채 전집』 1, 해밀, 2006,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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