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과학연구소 공동이사장으로 취임하다
『박현채 평전』 9장 외골수 지식인, 고난 끝에 날개를 달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2. 11(금) 19:00
글쓰기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을 보이며



박현채는 1989년에도 일간지와 대학 신문 기고 등을 포함하여 60여 편의 글을 썼다. 물론 학술 논문도 적지 않았다. 무크지에도 여전히 관여하고 있었다. 한마당 출판사에서 1989년 2월에 창간호를 낸 『사상운동』에는 좌담자로 참여했다. 「사회적 실천에서 사상의 문제」라는 글로 정리된 좌담으로, 사회는 김창호(당시 서울대 강사)가 맡았고 박현채와 함께 법성(당시 무등산 선정암 학상선원 주지)이 좌담에 참여했다. 이 좌담에서 박현채는 이론과 사상의 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상은 일면으로는 이론에 의해 그 내용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상이란 정밀화된 이론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이 다르면 반드시 사상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 이론이 보다 추상화될 때 사상적 기반을 달리하게 됨으로써 이론이 다르면 사상 또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박현채⋅법성⋅김창호, 「사회적 실천에서 사상의 문제」, 『사상운동』, 1989년 창간호, 23쪽


1990년에는 박현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5세에 결혼하여 1년 만에 박현채를 낳고, 평생을 이 아들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우리 나이로 73세에 운명을 달리했으니 짧게 사셨다고는 할 수 없으나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시대와 불화하는 아들 때문에 늘 불안 속에 살다 가셨다. 박현채는 어머니의 유해 앞에 엎드려 눈물을 뿌렸다. 그나마 정식 대학교수의 신분이어서 조문객도 많았고 장례는 초라하지 않았다.

박현채는 1990년과 1991년에도 강의 틈틈이 글을 썼다.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원고 청탁이 늘어났다. 아무리 연구 능력과 범위가 넓고 열정이 넘치더라도 환갑을 앞둔 나이에 그토록 치열하게 많은 글을 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991년에는 예년에 비해 원고 집필량이 줄어들었다.

1990년 도서출판 풀빛에서 내는 『사상문예운동』 여름호(제4호)에서는 박현채⋅김금수⋅장기표⋅채만수⋅김문수가 참석하여 지상 토론을 벌인 것을 「90년대 민족운동의 전략적 기초를 묻는다: 민족민주운동의 조직적 과제와 정치적 진로」라는 글로 정리해 실었다.

좌장(座長) 격인 박현채는 “현재 우리 운동의 과제는 민중적 기반을 갖지 않는, 그리고 민중적 요구를 추구하지 않는 정당 결성이 아니라 재야 민족민주운동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사회운동의 조직화⋅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재야 신당보다 민족민주운동의 활성화에 무게를 싣는 발언을 했다. 1990년 초 민정당⋅민주당⋅자민련의 3당 야합으로 거대 민자당이 결당되면서 재야 신당설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를 저지하는 발언을 통해 민주 세력의 분열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보수 대연합으로서의 민자당 결성에 대응하는 민주 대연합의 실현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현채는 여기에 전제를 달아, 민주 대연합에서 민족민주운동이 주축이 되고 한정적으로나마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민당의 평민연 그룹을 최대한 매개로 이용하면서 민족민주운동 세력과 보수 정당인 평민당이 연합하는 것이 민족의 자립과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박현채는 ‘광주항쟁 10주년 기념 전국학술대회’에 참가해 이수인⋅고은⋅김세균⋅김수행⋅김인걸⋅김진균⋅오수성⋅장을병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 토론문은 「광주 5월 민주항쟁의 학술적 재조명」이라는 글로 정리되어 『사상문예운동』 제8호(1991년 여름)에 수록되었다. 여기에서 박현채는 일부 식자들이 1950년대를 외면한데 대해 심도 있는 비판을 했다.

1980년이 1950년보다 앞선다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왜 우리가 사는 역사에서 그걸 빼버리고 1980년을 강조합니까? 5월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과학적 인식 없이는 역사의 발전도 없습니다. 과학적 인식만이 새로운 창조의 기틀입니다.

- 박현채⋅이수인⋅고은⋅김세균⋅김수행⋅김인걸⋅김진균⋅오수성⋅장을병, 「광주 5월 민주항쟁의 학술적 재조명」, 『사상운동』, 1991년 여름, 40쪽


그렇다고 해서 박현채가 5⋅18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었다. ‘과학적 인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무장 항쟁에 대해서도, 특정한 요구의 실현을 위한 의도적인 무장만이 진정한 무장 항쟁이라고 주장했다. 박현채는 “길가에 흩어져 있는 총을 줍는 것은 무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과학적인 태도입니까?”라며 ‘과학적 인식’을 통해 1940~1950년대의 ‘의도적 무장’을 5⋅18민주화항쟁과 견주어보려 했다.

한편 1992년에 한국사회연구소와 한겨레사회연구소를 통합하여 창립된 한국사회과학연구소에 박현채는 김중배와 함께 공동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연구소다운 연구소를 만들어 수장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것이었다. 연구소가 서울에 있어서 자주 찾지는 못했으나 회의에는 빠지지 않았다. 이해 5월에는 셋째 딸이 결혼하여 김형석을 세 번째 사위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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