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숭배하는 조선대 교수, 박현채
『박현채 평전』 9장 외골수 지식인, 고난 끝에 날개를 달다
화순저널입력 : 2022. 02. 04(금) 19:02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하다


박현채는 1988년 정윤형 등과 한국사회연구소를 설립하고 이사로 취임했다. 한국사회연구소는 추상적인 공리공론을 지양하고 구체적 분석과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대학원 석사 과정 이상의 연구자 100여 명과 교수 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실천적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활발하게 토론하며 정책 대안을 마련하자는 뜻이었다.

이어 1989년, 그의 생애에 있어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제도권에 편입되어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나이 60에 능참봉’이란 속언 그대로였다. 정년을 앞둔 나이라 할 만한 56세에 조선대학교 정교수로 취임한 것이다. 6월항쟁 덕택이었다. 비록 민주정부 수립에는 실패했으나 6월항쟁으로 한국 사회는 상당한 수준의 변혁이 이뤄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학 분규로 진통을 겪었던 조선대에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던 이돈명 변호사가 총장으로 영입되면서 ‘사변’이 일어났다. 이돈명은 유신과 5공 정권에 저항하면서 양심적으로 살아온 일군의 지식인들을 교수로 임용했다. 박현채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박현채는 내가 기용을 했는데, 기용한 이유를 간단히 설명을 하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은 그런 훌륭한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학자라는 점, 그리고 농업경제와 산업정책에 정말 우국적 견지에서 자기 학문을 닦아오고 그것을 계속해서 연구해오고 있는 학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학적 공로로 인해서 이미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으니까 각 대학에서 그 사람을 공식으로 교수로 채용은 못해도 과목을 줘서 시간강사 같은 그런 형태로 여기저기, 좋지 않은 눈으로 보면 보따리 장사지만, 그 사람 처지에서는 도리가 없이 그런 일을 해서,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고, 학생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거든요. 내가 그 학교로 가기 전부터. 그러던 차에 내가 학교로 가니까, 박현채 개인에 대한 억울함도 풀어주고, 또 조선대학교의 장래를 위해서 이런 교수를 확보해가지고 학교에 두면 얼마나 이 학교의 미래가 밝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내가 채용을 했죠.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이돈명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539쪽


이돈명 정도의 인물이니 박현채를 과감하게 조선대 교수로 초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부 교수진 일부와 외부로부터 심한 반발과 위협이 따랐지만 이돈명은 이를 물리치고 박현채를 끝까지 보호했다. 박현채는 난생처음 안정된 자리에서 월급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경제론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연구해온 경제학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조선대에서 ‘민족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던 박현채 선생은 만날 때마다 약간 들떠 있는 것처럼 마냥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랫동안 일정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여기저기 대학을 찾아 떠돌음했던 선생이 보로소 조선대 교수라는 안정적 자리를 갖게 되었으니 그도 그럴밖에.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바로는 박 선생이 조선대에서 첫 월급을 받고 의료보험증을 받았을 때 좋아라며 자랑을 하더라고 했다.

박현채 선생은 학생들한테 인기가 최고였다. 오랫동안 진보적 이론에 목말라 있던 학생들은 오랜만에 박현채 선생의 거침없는 강의에 매료당했다. 비로소 광주의 젊은이들이 사구체의 불씨를 안게 된 것이다.

- 문순태, 「백아산 시절을 이야기하다」, 『아! 박현채』, 해밀, 2006, 120쪽


광주 시절 초기 박현채는 시내 허름한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일요일이면 송기숙 등과 무등산과 백아산 등을 등반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얼마 뒤에는 무당산이 보이는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면서, 운전을 배워 자동차로 출퇴근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전남일보』가 창간되었는데 순천대학교 교수 문순태가 초대 편집국장으로 영입되어 진보적 목소리를 내면서 성가를 올리고 있었다. 박현채는 종종 이 신문의 좌담회에 참석하고 시론을 써서 지역의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토론을 하며 생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언젠가 현역 국회의원으로 광주에서 일을 보려고 충장로를 지나다가 이미 술에 거나해 있던 박 선배를 만났다. 그때는 그래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약간은 신분적 장애도 풀리고 술 먹을 용돈도 있던 때인데, 제대로 만나고 말았다. 단 둘이 그분의 숙소인 여관에 들어가 소주와 맥주를 사오라고 하여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은 그렇게 윽박지르거나 얕잡아보는 말씀보다는 잔잔한 어조로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을 조근조근 설명해주었다. 특히 동료나 선후배들 사이에서 제법 기대가 크니 참으로 정직하고 깨끗하게 정치하라는 당부를 간곡하게 말씀해주셨다.

- 박석무, 「아! 박현채 선배」, 『아! 박현채』, 해밀, 2006, 128쪽


오래전부터 박현채는 가까운 동료나 후배들을 만나면 격려를 잊지 않았다. 50세가 넘으면 ‘죽을 자리’를 찾으라는 말이 있다. 산소나 명당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생애의 후반기에 바르게 살고 옳은 일을 하라는 말이다.

1980년대 초반에 제가 계속해서 『동아일보』에 칼럼을 매주 썼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느 날 찾아왔어요. 소식도 없이 와서 하는 말이, 그때도 “네가 죽을 자리를 찾았구나. 제대로 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어렴풋이 삶을 이어오면서,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까, 말년이나 마지막 죽음 같은 것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촉발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죠.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김중배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421쪽


박현채의 강의는 금방 학생들에게 소문이 돌았다. 강의 시간에는 언제나 초만원이 되었다. 박중기의 증언에 의하면, 심지어 야간부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야간부 학생들에게도 박현채의 강의를 듣게 해달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학생들의 호응에 부응할 만큼 박현채는 강의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매사에 성실한 생활 태도가 강의 준비에도 그대로 배었다.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준비한 강의록을 출판하겠다는 회사가 줄을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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