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박현채의 동향
『박현채 평전』 8장 6월항쟁의 격랑 속에서
화순저널입력 : 2021. 12. 31(금) 20:25
지식인들이 산행 모임
‘거시기 산악회’ 참여



박현채는 1982년부터 유신 및 5공 체제에서 핍박받은 일군의 지식인들과 함께 ‘거시기 산악회’에 참여하여 정기적으로 산행을 했다. 산행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자 뜻 맞는 동지들과 회포를 푸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돈명⋅리영희⋅송건호⋅박중기⋅한승헌⋅이호철⋅임헌영⋅김정남⋅박석무 등 비판적 지식인들이 산악회 멤버였다. 북한산을 비롯해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답사하면서 시중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산중에서 거리낌 없이 논했다.

멤버들 대부분은 권력에 ‘찍힌’ 인물들인지라 주위에는 항상 검은 그림자가 얼씬거렸고, 전화가 도청되어 대화도 쉽지 않았다. 이들이 등산을 즐겼던 이유다. 하산하여 뒤풀이를 할 때면 빈대떡에 소주나 막걸리가 전부였으나 한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박현채는 술을 매우 좋아하는 두주불사 스타일이었지만, 절대 취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흐트러짐 없는 학문적 자세와도 상통하는 면모였다. 술값은 대부분 변호사인 이돈명이 냈다.

1981년 7월쯤이던가. 한 시대의 무도한 독재 권력으로부터 얻어터지며 살아온 이른바 민주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설악산을 오르게 되었던 것.

몹시 무더운 여름 날씨에 나는 가뜩이나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앞서가는 이의 뒤를 그럭저럭 따라가는 식이었다. 도중 파라솔 매점 그늘에서 우연히 몇 사람이 함께 쉬게 되었다. 거기에 박현채 교수가 합류해서 조화순, 이해동 두 목사님과 나 이렇게 네 사람이 둘러앉아 땀도 식힐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우리 넷 모두 34년생, 개띠〔甲戌生〕임을 확인하고 한바탕 웃었다. 그 자리에서 함께 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개띠끼리니까 이름을 ‘개 파티’로 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개에 무슨 파티인가, 개가 모이는 판이니까 ‘개판’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개판’이란 모임이 탄생했다.

우리 사이의 공통점이란 이 점 말고도 우선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싸움의 동지이자 빵잡이(수감자)들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인고의 삶을 헤쳐 나왔다는 점도 비슷했다.

- 한승헌, 「‘개판’의 인연」, 『아! 박현채』, 해밀, 2006, 349~350쪽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차츰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술을 줄이게 되었다. 술을 통해 발산되던 호기는 내면으로 침전되었고, 정신의 충전은 많은 글로 나타났다.

한편 박현채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으며, 집에서는 수백 쪽의 난을 키우고 금붕어와 새를 길렀다. 그에게는 감성적인 면이 많았다.

감성적인 것도 굉장히 중요시하셨어요. 한 동생이 꽃밭이 있는 꽃을 보고 섰을 때, 감정을 잘 느껴봐라 가르쳐주시고, 그리고 새도 여러 종류로 다 키웠어요. 그때 생각해보면 저희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그중에서도 새를 쌍으로 하나씩 저희들에게 사주셨어요. 누구는 카나리아 한 쌍, 누구는 다른 거, 이렇게 해서 키워보라고 하시고, 금붕어도 종류별로 키우시고, 저희보고 항상 그걸 지켜보고, 오늘은 뭐가 어떤 일을 했는지 써봐라 이렇게 얘길 하시고 그래서, 요즘에 생각해보면 옛날엔 뭘 자꾸 귀찮게 하라고 그러시나 그랬는데, 인성 교육 같은 걸 해주신 것 같거든요.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큰딸 박순정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439쪽


박현채 가족은 오랫동안 서울 성북구 수유리 472-54번지에서 살았다. 부모님이 아들을 찾아 서울로 이사 오면서 마련한 단독주택이었다. 1964년경부터 이 집에서 살다가 1979년경부터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 93-5번지로 옮겼다. 역시 단독주택이었다. 박현채로서는 평생 집 살 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실업자’ 신세였으나, 아내의 노력으로 집 걱정은 면할 수 있었다. 박현채의 가까운 벗이었던 박중기에 의하면, 박현채의 아내는 남편이 구속되었을 때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고, 집을 지어서 팔고 다시 지어 가정집으로 삼았다고 한다. 상수동 집은 2층이어서 박현채의 서재도 마련하게 되었는데, 난을 특히 좋아해 100여 개의 난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식구가 많은 데다가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탓에 생활은 언제나 쪼들렸고 쌀이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박현채는 50대 중반까지 시간강사, 즉 지식 보따리 장사로 연명했다. 늘 글을 썼고 더러 강연을 하여 푼돈이 생겼지만 공안 사건이 벌어지거나 정치적으로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면 그마저도 중단되었다. 친구들이 “언제까지 실업자 노릇을 할 거냐”고 농담 삼아 물으면 자기는 ‘실업가’이지 ‘실업자’는 아니라고 태연히 받아넘기면서 결코 궁핍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 밥을 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광주서중 동창으로 오랜 친구인 언론인 김중배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일 내가 가슴 아팠던 것은, 아침마다 이 사람이 나와서 집 앞에서 운동을 한다고 가벼운 체조 같은 것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이나 나하고 동기동창인 어떤 친구가 회사에 다니는데 출근길이 꼭 그 사람 집 앞을 지나게 되었대요. 옛날 세대이니까 그랬겠습니다만, 아침 인사가 “너 밥 먹었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침을 굶고 체조를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지나가면서, “너 밥 먹었어?” 그래서 얼떨결에 “먹었어” 그러니까 지나가더랍니다. 사실은 쌀 살 돈이 없어서 그놈이 아침에 지나가겠지, 그러면 나와 있다가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밥 먹었어?” 하니까 그냥 “먹었어” 하고 대답이 나오더라고, 그 얘기를 웃으면서 해요. 그런데 그게 웃으면서 할 얘기가 아니죠. 듣는 사람들이 가스림이 쓰린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 「「KBS 인물현대사」 인터뷰 녹취록」(김중배의 인터뷰), 『박현채 전집』 7, 해밀, 2006, 421~422쪽


박현채는 일정한 직장이 없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생활인이었지만,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생계의 어려움으로 가슴이 먹먹할 때에도, 고난과 시련으로 마음이 울연할 때에도,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토록 많은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런 근면성 때문이었다. 큰딸의 회고에 의하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고서도 새벽 일찍 일어나 글을 쓰곤 했던 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박현채의 오랜 친구인 임동규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가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따뜻함과 격정이 있는 사람으로 박현채를 기억하고 있다.

한편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민족운동, 독립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등을 했던 이들의 가족사 문제이다. 박현채의 가족과 친척들을 여타의 운동가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신산한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서울에서 함께 사는 가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친척들도 정보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형제들 중에는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심지어 군대에서 정신병원에 수용된 경우도 있었다.

박현채의 동생들 사연을 좀더 살펴보자. 한 동생은 입대하여 부대에 배치된 후 박현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훌륭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가 바로 보안사헌병대로 끌려갔고 결국 제대를 당했다. 또 다른 동생도 형에 대해 “민족주의자”라고 답변했다가 59후송병원의 정신병동에 수용되었고, 이후 전역 처분을 받았다. 그 동생을 담당했던 군의관은, 자기도 박현채의 책을 많이 읽었다면서 나중에 억울하면 재판을 받으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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