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크지의 시대,
단골 필자로 등장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출신 김언호는 “우리 시대의 삶과 사상의 구조를 밝히고 이 땅의 역사적 현실을 해석하는 공개된 자리”를 만들겠다는 사명을 내걸며 『한국사회연구』를 창간했다. 한길사에서 1983년 여름부터 펴낸 이 무크지는 연 2회 발행되었다. 창간호에는 박현채를 비롯하여 리영희⋅송건호⋅김진균⋅송기숙⋅전철환⋅이대근⋅신경림 등 진보적인 학자 및 문인들이 참여했다. 박현채는 ‘1945년 이후사의 조명’이라는 연속 기획 지면에 「해방 전후 민족경제의 성격」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5공 체제 이후 대중매체에 비중 있는 평론으로는 처음이었다.

경제 전문가의 논설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현채의 글에는 각종 증빙 자료와 통계, 도표 등이 꼼꼼하게 붙어 있는 탓에 일반 독자들로서는 글에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주변에서 이를 지적해도 그는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학자로서의 성실성을 견지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서는 그의 글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해방 전후 민족경제의 성격」도 그러한 글 중 하나였다. 박현채는 이 논문에서 민족경제의 성장 및 발전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독점자본의 식민지적 초과이윤 실현의 과정으로써 식민지 시기의 한국경제가 자본제화(資本制化)를 이룩했다고 전제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한국경제는 민족경제와 국민경제가 괴리되었는데, 이는 달리 본다면 외국자본의 이해와 민족적 이해 사이의 괴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때의 자본제화는 민족 모순이 반영된 것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억압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주요한 경제적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박현채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조선경제연표』 등의 자료를 제시하며 당대의 경제 상황을 면밀히 추적했다.

박현채는 『한국사회연구』 제3권에도 「분단 40년의 한국 자본주의와 농업」이라는 논문을 싣는다. 이 논문은 ‘민족경제의 현실과 노동자⋅농민운동’을 다룬 특집 기획으로 유인호의 「민족경제의 발전과 왜곡」, 김윤환의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노동운동」과 함께 수록되었다. 이 글에서 박현채는 농업에 대한 이전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한국농업이 소경영 양식을 극복함과 동시에 농민적 진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크게는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적 구조가 청산되어야 하고, 농업 내부적으로는 생산의 공동화에 의한 협업 경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길사에서 『한국사회연구』를 발행할 즈음 창작과비평사는 『한국민족주의론』이라는 무크지를 발간하기 시작한다. 1980년대 들어서 민족주의 담론이 이렇게 무크지의 주제로까지 등장하며 생명력을 얻게 된 것은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미국의 입장 및 역할이 문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미문화원을 점거, 방화한 것도 이 같은 상황 인식에서였다.

『한국민족주의론』의 제1권에서는 정창렬⋅강만길이, 제2권에는 박현채⋅강만길이, 제3권에는 박현채⋅정창렬이 각각 편자로 선임되었다. 박현채는 제2권에서 「분단 시대 한국 민족주의의 과제」를, 제3권에서는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과제와 농민운동」을 맡아 집필했다.

무크의 바람은 계속되어, 도서출판 돌베개 역시 무크지 발행의 대열에 합류한다. 1985년부터 『해방 40년의 재인식』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박현채는 1986년 11월에 발행된 제2권부터 한상진과 함께 편자로 참여했다. 그는 이 무크지에 자신이 쓴 「70년대 노동자⋅농민운동」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글을 엄선해 수록했다. 이 시기에 박현채는 비판적 재야 지식인으로서 출판계의 단골 필자이자 무크지의 편자로 대두되었다. 그의 위상과 글은 그만큼 ‘활용 가치’가 있었던 셈이다.

한편 도서출판 풀빛에서 발간한 무크지 『현실과 전망』은 1984년 11월에 창간되었는데, 그다음 해 4월에 “민중 시대의 힘찬 전진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현실과 전망”이라는 담대한 구호와 함께 제2권이 발간되었다. 제2권의 표제는 ‘민족운동과 종속 경제’로, 편집자는 이 주제를 담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족운동과 종속 경제는 1970년대 이후 성장해온 민중적 이해에 기반한 노동⋅농민⋅학생운동 등 부문 운동을 전 세계적 자본 운동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의 민족운동이라는 큰 테두리로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한국경제의 대외종속성 해부에 힘을 기울여, 매일 매일의 긴박한 당면 문제 해결에 몰두하면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장기적⋅전략적 상황 정검에 관심을 환기한다.

- 『현실과 전망』 2, 풀빛, 1985, 뒤표지

박현채는 이 무크지에 「한⋅미⋅일 경제 유착의 민중사적 의미」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미⋅일의 경제 유착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간 여러 논문에서 이 문제를 간헐적으로 취급했으나, 여기에서는 아예 이를 주제로 내걸고 천착에 나섰다. 박현채는 한⋅미⋅일 삼각 동맹이 경제적 관계를 넘어서 군사⋅정치적 관계까지 확장되고 있다고 보면서 문제를 제기했다. 아마도 그는 한⋅미⋅일 관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간의 선진자본의 운동이 낳은 한국 자본주의의 상황은 민중 생활을 열악한 것으로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 이외의 정치⋅사회⋅문화⋅군사적인 면에서 민중의 요구나 민족의 요구를 부정하고 있다는 데서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본의 논리 관철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적인 민중적 실천이 이것을 극복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민족의 자주⋅자립과 통일 그리고 민중의 소외로부터의 해방은 바로 이와 같은 한⋅미⋅일 간의 경제적⋅종속적 결합 관계를 대등한 자주적 관계로 변화시키는 데서 비로소 그 단서가 주어질 수 있다.

- 박현채, 「한⋅미⋅일 경제 유착의 민중사적 의미」, 『현실과 전망』 2, 풀빛, 1985,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