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항쟁 전야,
심상치 않은 광주에서


광주에서는 1980년 3월부터 신군부 세력을 규탄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연일 계속되었다. 집회의 연속선상에서 5월 17일 저녁 양서협동조합 주최로 광주여자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경제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이날의 연사는 다름 아닌 박현채 형이었다. 강연은 1층 대강당에서 열렸는데 입추의 여지 없이 시민, 학생들로 꽉꽉 들어찼다. 당시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반영하는 듯했다. 특히 고등학생들도 많이 모였는데 학교 측의 방해 공작에도 굴하지 않고 모인 것을 보면 당시 고등학생들의 선진적인 의식도 엿볼 수 있다.

강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우리는 자주 이용하는 식당으로 가서 뒤풀이 행사를 가졌다. 자정이 지날 무렵, 라디오에서 이상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국에 비상계엄령 확대 실시”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박 형이 대뜸 “낌새가 이상하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앞으로 서로 연락하지 말고 뿔뿔이 흩어져 지내자”는 말과 함께 “문병란 선생을 잘 모시고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 장두석, 「박현채 형을 기리며」, 『아! 박현채』, 해밀, 2006, 286쪽

이날 밤 전두환 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민주 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이튿날부터 광주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시민항쟁이 전개되었고,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무차별 살상했다. 광주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박현채는 광주 학살의 광풍 속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박현채의 이력으로 미루어본다면, 이 과정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당시 광주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신군부 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무장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 빨치산 출신으로 격렬한 투쟁에 참여한 이력이 있는 박현채가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실 그에게 광주는 ‘외지(外地)’였는지라 저항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조직적 연대’의 인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항쟁의 현장에서 이탈한 것은 평소의 신념과는 다른 처신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지우(知友)인 박중기는 자신이 박현채의 부인을 만나 “자칫 개죽음을 당할지 모르니 광주로 내려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남편을 서울로 모셔오라”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박현채도 ‘지식인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과 관련해서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1주일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송건호와 이호철 등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에 비해 비교적 수월하게 풀려난 것은,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주모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980년 9월 1일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던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0월 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이 확정되면서 이른바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3월 3일 또다시 체육관 선거를 치러 전두환은 제12대 대통령이 되었고, 3월 25일 제11대 총선이 실시되면서 5공 체제가 수립되었다. 10∙26사태로 한때 찾아온 민주화의 봄은 그렇게 권력의 맛을 본 정치군인들에 의해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