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 김대중 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하다
3장 ‘지식 보따리상’의 길에 들어서다
화순저널입력 : 2021. 07. 23(금) 19:23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를 구상하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가 5∙16 쿠데타로 집권한 지 10년 만에 치르는 대선이었다. 그전까지는 구시대 정치인의 대명사격인 윤보선과 두 차례 대결을 해서 모두 박정희가 승리했다. 그런데 1971년 대선은 양상이 많이 달랐다. 우선 야당 후보로 당내의 치열한 경선 끝에 40대의 김대중이 선출되었다. 국민의식도 달라지고 있었다. 10년간의 박정희 집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해졌다.

4∙27 대선 과정에서는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정책 대결을 주도해나갔다. 그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소련∙중국∙일본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두 개의 정권을 당분간 함께 인정하는 대신 침략 전쟁을 억제하도록 보장하자는 내용의 ‘4대국 보장론’을 비롯하여 동구권과의 수교, 납북 유엔 동시가입론, 예비군 폐지 등 파격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이런 이유로 지식인들 중에서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이 나타나면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김대중의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박현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대중의 글을 몇 차례 싣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김대중과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김대중의 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하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선 후보가 되면서 박정희의 재벌 위주 경제정책에 대응하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대중경제연구소의 김경광 소장을 비롯해 5~6명의 중견 학자들에게 경제정책의 방안을 의뢰했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대중경제론(大衆經濟論)’을 제시하면서 이론적인 틀을 소장 학자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데 야당 후보 진영의 일거수일투족이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되었는지라, 집필자들이 서울에서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김경광은 박현채∙정윤형∙정홍대∙임동규와 함께 서울을 피해 온양의 한 여관에 투숙객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보름 동안 합숙하며 원고를 집필했다. 이렇게 하여 1971년 3월 7일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정책 공약 소책자가 만들어졌다.

나의 구상들은 1971년 출간된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당시에 내가 경제 자문을 받아온 김병태∙장윤형∙박현채∙최호진 교수 등 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방대엽∙김경광 등 비서들과의 토론을 거쳐 유권자를 위한 문답식 선거 자료로 만들어졌다. 대중경제론의 해설서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만드는 데 정보기관의 방해 책동은 실로 상상 이상이었다.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여관을 전전해야 했고, 점조직 식으로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인쇄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몇 사람은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0, 221~222쪽


대중경제론은 대중이 참여하는 시장경제를 모델로 만들어본 것인데, 우리 정치사에서는 정책 대결의 장을 여는 획기적인 정책 이론이자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이론이었다. 김대중 역시 이를 검토한 후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면서 여러 사람이 작업했음에도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앞뒤가 맞아떨어진다며 격찬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박정희 대선본부에서도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전전긍긍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

1971년 대선 때 출간된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은 뒷날 김대중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출판한 『대중경제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중경제론』의 뿌리는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에서 기원한다. 또 이는 박현채가 설파한 ‘민족경제론’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세부적으로는 100개의 소주제에 대한 해설 형식을 취했다. 이 책에서는 대중경제의 이론을 먼저 거론한 후, 외자도입정책∙무역정책∙금융정책∙노동정책 등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기술하고, 마지막에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 집필에 참여했던 김병태의 증언을 토대로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박현채는 이 책의 서두에서 “한마디로 말하여 대중경제체제는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다”라고 선언했다. ‘대중에 의한’이란 지식인, 민족자본가,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사회의 각계각층이 경제 건설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이 경제 건설에 참여한다는 것은 경제 주체로서 기업이 대중화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물론 후진국에서 경제개발을 하려면 자본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 부족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고,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다음으로 ‘대중을 위한’이라는 말은 생산의 과실이 대중의 생활양식을 위해 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간 특권 경제와 의존 경제 때문에 산업 간∙계층 간의 소득 격차가 벌어졌던 것을 극복하면서, 우리나라가 당면한 최고의 국가 목적을 조국 통일에 둔 후 대중경제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책자와 관련한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대선 과정에서 국가총예산의 10분의 1 이상을 살포하고 관권을 동원하여 삼선에 성공한 박정희 세력은 이 책의 저자들에 대한 가혹한 보복에 나섰다. 불행 중 다행으로, 김경광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끝까지 단독범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박현채 등 다른 필자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낙원동에 있었던 건국대학교 부설 한국농업문제종합연구소에 초췌한 몰골로 김경광 씨가 나타났다. 무사했던 것으로 알고 반갑게 맞이했더니 그것이 아니었다. 책은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붙들려가서 쓴 사람을 대라고 모진 매를 맞았단다. 끝까지 자기 혼자서 다 썼다고 버텨 매를 한없이 맞았다고 한다. 좌우 턱뼈가 부러지고 위아래 어금니가 다 빠지고 가리지 않은 몽둥이질, 발길질로 갈비뼈도 몇 개나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 신세를 몇 달간 지고 있느라고 찾아뵙기가 늦어졌다고 했다.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내가 매를 맞은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다. (……) 그 후 김경광 씨는 대중경제연구소에서 물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994년 7월,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김병태, 「대중경제론에 얽힌 사연」, 『아! 박현채』, 해밀, 2006, 54~56쪽

화순저널

hsjn2004@naver.com

주요기사더보기

기사 목록

화순저널 PC버전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