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자리한 학포당(學圃堂)은 조선 중종대의 문신이자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 화가였던 양팽손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공간이다. 양팽손은 1519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사사(賜死)된 스승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하며 의리를 지켰고, 낙향 후 학포당을 창건했다.

이 학포당에는 창건 당시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5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온 거대한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12m에 달하는 이 나무는 그 압도적인 위용으로 2022년 화순군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사계절 다른 색으로 변하면서 학포당 전체를 감싸고 묵묵히 마을과 서재를 지켜온 역사와 정신의 상징이다.

은행나무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생존력에 있다. 은행나무는 무려 2억 7천만 년 전 대멸종을 견뎌낸 살아있는 화석이다. 이 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병충해도 잘 이겨내는 극단적인 내성을 지녔으며, 세포의 염분 조절 능력이 뛰어나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귀족형이고, 단풍나무가 화려한 미인형이라면 은행나무는 우아한 강인형이다.

식물학적으로 은행나무는 잎이 넓어 보이지만, 활엽수도 침엽수도 아닌 독자적인 계통군에 속하는 특별한 존재다. 씨앗이 겉으로 드러나는 겉씨식물이라는 점에서 침엽수에 가깝게 분류되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부채꼴 잎이 오리 발을 닮았다는 뜻의 압각수(鴨脚樹), 할아버지가 심어 손자가 씨앗을 수확한다는 의미의 공손수(公孫樹)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놀라운 환경 정화 능력 또한 은행나무의 큰 가치다. 광합성 능력이 뛰어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하여 대기질 개선 기능이 탁월하며, 연구에 따르면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매년 35kg의 먼지와 오염물질을 제거한다. 여름철 활발한 증산작용으로 표면 온도를 낮춰주는 덕분에 은행나무 아래는 최고의 쉼터가 되었다.

다만, 은행은 씨앗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상태에서 씨앗을 멀리 퍼뜨릴 동물이 없어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번식해 왔다. 극히 예외적으로 너구리나 오소리 같은 일부 동물만이 높은 위산 농도로 독성을 제거하고 은행을 섭취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은행나무는 인간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할, 인간이 지켜낸 마지막 선물인 것이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없어서 못 먹을 만큼 귀한 약재이자 양식이었던 은행이 이제는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가난한 시절에는 감지조차 되지 않던 그 냄새가 살림살이가 넉넉해지자 비로소 참을 수 없는 불쾌함으로 돌변한 것이다. 어쩌면 고약한 것은 변해버린 은행의 냄새가 아니라, 배가 부르자 지난날의 고마움을 잊고 쉽사리 등을 돌려버린 사람들의 간사한 마음이 아닐까?

오늘도 학포당 은행나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쌍봉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잇는 이 거목은 나무를 넘어선 사람들의 애틋한 손길로 지켜낸 생명의 기록이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이야기처럼, 은행나무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마을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쉼터로 우리 곁에 머물 것이다.

김일호
산림치유지도사
숲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