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라,
논쟁을 전개하며


민족경제론을 제기하고 사구체 논쟁을 거치면서 박현채는 경제평론가, 경제학자에서 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라선다. 5∙16쿠데타로 유신 체제를 겪으면서 다수의 지식인들이 시대정신을 잃고 ‘도구적 지식인’으로 전락했을 때 그는 실천적 학문의 탐구에 열정을 쏟으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박현채의 경제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던 애덤 스미스, 칼 마르크스, 조지프 슘페터는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상가이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현채 역시 경제 분야를 뛰어넘어 폭넓은 학문을 수렴하면서 민족 모순과 시대 모순의 현장에서 위엄 있고 담대한 발언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박현채가 앞서 제기하고 불붙인 사구체 논쟁은 1980년대 중반 한국 지식인 사회의 거대한 담론이 되었고, 운동론과 결합하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도서출판 죽산은 1988년부터 박현채와 조희연(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을 편자(編者)로 하여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단행본으로 묶어내기 시작했다. 1989년 1월 발행된 『한국사회구성체논쟁』 제1권에서 편자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격과 그것의 실천적 함축을 둘러싸고 전개된 다양한 논쟁을 총괄하여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 혹은 ‘한국 사회 성격 논쟁’이라고 불러왔다. 이 논쟁은 1980년경 공개적인 논쟁으로 전환된 이후, 이론적 역량과 실천 경험의 축적에 상승하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논쟁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런데 논쟁이 발전되어가면서 논의의 영역이 확대되고 논의의 심도가 깊어지면서, 최근에는 학술 연구자들이나 관심 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너무 복잡하고 전문적이어서 갈래를 잡을 수 없다”라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이 논쟁에서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어 온’ 편자들로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책무’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 박현채∙조희연 공편, 「책을 펴면서」,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 죽산, 1989, 3쪽

사구체 논쟁이 확대되자, 근래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전개되는 유의미한 학술 논쟁이라는 유용론(有用論)과 함께, 실천과 유리된 현학적이면서도 관념적인 논쟁이라는 무용론(無用論)이 겹쳐서 제시되었다.

사구체 논쟁이 진보 학계의 거대 담론으로 부상하자, 출판사는 이후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을 3권 더 간행하여 논쟁을 확산시켰다. 이들 4권 책의 부제는 각각 ‘80년대 한국 사회 변동과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개’, ‘현 단계 사회구성체 논쟁의 쟁점’, ‘논쟁의 90년대적 지평과 쟁점’, ‘동유럽 사태와 우리 사회 변혁론 논쟁’이었다. 박현채는 이 책의 1권에 『창작과 비평』에 실었던 「현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와 「민족경제론의 구성과 기초 이론」,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을 수록했다. 이후 계속 간행된 책에는 더 이상 자기 글을 수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실으며 논쟁을 이끌었다.

‘사구체 논쟁’의 사회적 배경과 전개과정을 연구한 여현덕(현 유엔평화대학 아태센터 사무총장)은, 우리 사회에 변혁 운동의 과헉적 이론 정립과 실천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회 발전의 역할과 근거를 총체적으로 해명해보려는 시도로서 사구체론이 도출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논쟁의 주요 내용과 의의를 다음의 네 가지로 분석, 정리했다.

첫째, 사회 발전에 있어서 모순의 본질과 위치 및 상호 관계를 파악하고, 그 단계의 성격을 규명하고자 했다. 둘째, 그러한 성격 규명을 바탕으로 변혁의 대상과 성격, 동력을 설정했다. 셋째, 그 가운데서 사회 변혁의 논리와 주체∙동맹∙제휴 세력을 분석했다. 넷째,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변혁 주체들에게 전략∙전술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