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지식인’,
지식의 날개를 펴다


인혁당 사건 연루자를 교수로 받아주는 대학은 한국에 없었다. 그나마 각 대학에서 강의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박현채의 해박한 경제학 지식 덕분이었다. 여권 발급이 되지 않았기에 해외 대학으로는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현채는 홍성하 등과 함께 국민경제연구소를 설립한 후 해마다 한국 경제에 관한 간행물을 발간하면서 연구에 천착했다. 국민경제연구소는 그럴듯한 명칭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울 중부경찰서 맞은편 골목길 3층에 작은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박현채의 연구와 저술의 산실이 되었다.

1964년 12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여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8월 13일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앞서 7월 9일에는 한미행정협정도 조인되었다. 1967년 5월 3일에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재선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삼선개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무색하게 하는 부정을 저지르며 제7대 국회의원 총선을 치른다. 이에 반발하며 고등학생들까지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서자,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대학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東伯林) 사건을 발표하면서 음악가 윤이상 등 104명을 구속 송치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는데, 이를 명분 삼아 4월 1일에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24일에는 김종태(金鍾泰)가 전후 4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면담하고 북한의 공작금을 받아 통일혁명당(통혁당)을 결성, 반정부∙반미 데모를 전개하려 했다는 이른바 통혁당 사건이 발표된다.

동백림 사건에 이어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벌어지고 통혁당 사건까지 터지자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는 박정희 체제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는 지속적으로 삼선개헌에 대한 속심을 내보였다. 공화당의장 윤치영(尹致暎, 1898~1996)은 박정희를 “단군 이래의 지도자”로 추켜세우면서 그가 장기집권을 해야 한다며 드잡이 노릇을 했다.

공안 정국이 강화될수록 박현채의 삶은 힘겨워졌다. 이미 전력이 드러나 있기에 공안 사건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수사기관의 촉수가 따라붙었다. 그만큼 힘겨운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박현채는 1967년 「중소기업의 지역적 불균형 발전의 요인」이라는 연구보고서를 집필하는데, 여기에서는 민족경제론의 기본 구상 및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이후 1970년부터는 농업 문제에 대한 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사상계』에서 1970년대를 맞아 1월호 특집으로 ‘송구영신의 전환점: 새로운 선택을 위하여’라는 꼭지를 기획하여 박현채에게 글을 청탁했는데, 그는 「농공병진(農工竝進)에로의 환상과 농업 문제의 핵심」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농공병진’을 구호로 내건 데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었다.

그런데 이채로운 것은 같은 월간지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金大中, 1924~2009)의 「70년대의 비전: 대중민주체제의 구현」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자신의 글이 실린 『사상계』를 받아들고 읽다가 박현채의 글에 감명받아서, 이듬해 대통령 후보가 된 후 박현채에게 대중경제론의 골격을 의뢰했다고 한다.

한편 박현채는 1970년 9월 창간된 월간 『다리』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은거’의 지식인에게서 사회참여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했다. 『다리』는 야당 정치인 김상현(金相賢, 1935~)이 발행하는 종합 교양지로, 진보적 지식인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초기에는 문학평론가 구중서(具仲書, 1936~)가 주간, 임헌영(任軒永, 1941~)이 기획부장을 맡았는데, 구중서가 곧 떠나면서 임헌영 주간 체제가 자리 잡았고, 박현채를 비롯해 한승헌∙장을병∙탁희준∙김동길이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창간 당시에 사시(社是)는 ‘너와 나의 대화의 가교’였는데, 창간 1주년 기념호인 1971년 9월호부터는 ‘민족 활로의 가교’로 바뀌었다.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김상현이 『다리』를 발행한 것은,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비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홍보 전략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상황에서 『다리』는 진보적인 교양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박현채는 경제분야에 특출한 능력이 있었기에 37세의 나이에 당대의 명사들과 함께 월간 교양지 편집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1970년 나는 『주간경향』에서 월간 『다리』로 직장을 바꿨는데, 내가 착수한 첫 작업이 편집위원을 개편하는 일이었다. 경제 분야는 당연히 박 선생〔박현채-필자〕을 모셔서 이 계통의 필진을 강화했다. 그는 필진 동원에서 무한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천거해서 편집 실무진을 놀라게 했다.

서울 소재는 물론이고 지방 대학과 각 언론 기관, 심지어는 경제 관련 기관의 인사까지 총망리하여 해당 주제에 걸맞는 필자를 거명했는데, 내용이나 주제의 취급 방향에서 전혀 실패가 없었다.

- 임헌영, 「박현채 선생에 대하여: 내 청장년기의 스승」, 『아! 박현채』, 해밀, 2006, 272쪽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에서 그는 설 땅을 제대로 갖지 못한 처지였지만, 그의 주변에는 뛰어난 지식인, 운동가들이 모여 들었다. 『다리』 발행인이었던 김상현은 박현채에게 “약간 조심스러운 듯하면서도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압도하면서 그 체력과 정력이 일치하도록 이론과 고집으로 압도했다”라고 회고한다. 또한 “가까이 하기에는 어렵고 조심스러웠지만 경계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의 술꾼에다가 해박한 지성과 넉넉한 인품이 있어 주변에 많은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늘 함께했다”고 말했다.

박현채는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정희의 근대화 정책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다리』에 쓴 글들도 예외 없이 농촌 경제의 몰락을 비판하면서 근대화의 외자 의존성과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정책에 대한 반민족성을 준엄하게 질책하는 논조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