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에 연루,
감옥에서 한 해를 보내다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자 독재자들이 흔히 쓰는 공안사건을 들고 나왔다.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들이 조직을 만들어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을 터뜨린 것이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1962년 1월 북한에서 특수 사명을 띠고 남파된 간첩 김영춘,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지역 간사장 도예종(都禮鐘, 1942~1975) 등이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 서신∙문화∙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노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혁당을 발족시킨 후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 조직 중 하나였던 불꽃회의 대표 김정강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일기에 도예종이 등장한 데서 비롯되었다. 학생운동의 배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인혁당 사건이 불거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총 47명을 송치했으나, 서울시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하여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공소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한국인권옹호협회에서는 사건의 무료 변론을 맡기로 하고, 사건에 대한 철저한 내막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조사단을 구성, 피고인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고문 내용을 폭로했다. 그 뒤 한신옥 검사는 26명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으나, 재수사 결과 14명이 공소 취하되고 나머지 12명은 반공법 위반으로 공소 변경되었다.

1965년 1월 20일 서울 형사지법 합의2부(재판장 김창규)는 도예종에게 반공법 4조를 적용해 징역 3년, 추가 기소된 양춘우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의 실체였다.

인혁당 사건은 담당 검사들이 공소유지 불가능을 이유로 사퇴할 만큼 근거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박현채도 여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는 1964년 8월 14일에 도예종∙정도영∙김영광∙김금수∙박중기∙김한덕 등과 함께 검거되어, 9월에 5년 형을 구형받았다. 구속되기 직전 둘째 딸 금정이 태어났으나 아내의 산후 조리도 제대로 돕지 못한 채 조사를 받으러 끌려가야 했다.

박현채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에서 각각 20여 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가혹한 고문과 구타도 당했다. 이후 함께 수형 생활을 했던 김정남은, 북한과 연계된 인혁당이 전국의 대학가에 번져 나가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배후에 있다는 각본을 만들어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 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정치 공작에는 엄청난 고문과 협박이 뒤따르는바, 사건 연루자들은 중앙정보부와 검찰 등의 수사기관에 한번 조사를 받으러 나가면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다. 이 사건의 변호사였던 박한상(朴漢相, 1922~2001)은 피고인들을 면담한 뒤 이들 중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전기 및 물 고문을 당해 피를 토한 사람도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박현채의 경우, 빨치산 전력이 알려지면서 더욱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 신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래도 잘들 버텼고, 그것이 검찰로 하여금,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구성의 죄까지 뒤집어씌울 수는 없게 했다. 우리는 조사받으러 나가고 들어올 때는 물론 감옥 안에서도 독방에 갇힌 흉악한 국사범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감시를 받아야 했다. 나는 3사 24방, 박 선생[박현채-필자]은 당시 소년수 사동이었던 2사상 22방이었다. 우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아는 체를 하지 않았지만, 방에 들어와 있을 때는 틈만 나면 건너편과 손짓, 발짓으로 통방을 했다. 그때 나는 20대 초반이었고, 박 선생은 막 30대 초입이었다.

- 김정남, 「1964년 여름」, 『아! 박현채』, 해밀, 2006, 81~82쪽

함께 구속된 김금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중앙정보부 최조실에서 박현채를 다시 만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혁당 사건의 공범자 처지로 한 오랏줄에 묶여 취조를 받으러 갔다가 해후한 셈이다. 하지만 박현채는 그런 상황에서도 행동이 유별났다고 한다. 취조실이나 감옥에서조차 당황하거나 주눅 든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를테면 “담배도 음식인데, 피의자들에게 음식을 굶겨서는 안 되니 하루에 한 갑씩 담배는 꼭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 덕분에 모두들 취조 과정에서 담배를 굶지 않아도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검찰의 취조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담당 검사는 혼잣말처럼 “당신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현채 그 사람이 수상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금수는 박현채의 해박한 학식과 당당한 태도 때문에 검사들마저 그런 말을 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5∙16 쿠데타 세력들에게는 미국의 환심을 사면서 지지를 얻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다. “공산 계열과 연결이 있었던 과거와의 단절을 더욱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법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자’를 만들어 처형해야 했다. 5∙16쿠데타의 첫 칼질이 혁신진보 세력 위에 내려졌다.”

과거 남로당에 연루되었던 이력 때문에 박정희는 특히 좌익계 인사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이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공안 사건을 확대하거나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되곤 했다. 박현채 역시 이런 경우였다.

그는 1965년 1월 20일에 무죄 선고를 받지만, 5월 29일의 항소심에서 엉뚱하게 도예종에 대한 은닉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박현채는 악명 높은 서울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그곳은 일제강점기의 서대문구치소로, 한말 의병을 비롯하여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대표들이 수감되고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곳이었다. 또한 이승만에 의해 정적 조봉암(曺奉巖, 1898~1959)이 사법살인 되고, 박정희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趙鏞壽, 1930~1961)를 처형한 곳이기도 했다.

모진 시련 끝에 출옥한 박현채는 다시 서울대∙홍익대∙국민대∙경희대∙충남대∙한신대 등을 돌며 시간강사로 생업을 유지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직업을 ‘강사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