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연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다

박현채보다 1년 앞서 농연에 들어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던 김병태(현 건국대 명예교수)는, 박현채가 연구위원 공채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도 면접에서 실점하여 불합격할 뻔했다고 회고했다. 박현채는 면접 자리에서 조금도 굽힘 없이 자신의 경제 이론을 제기했고, 면접관의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대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5명의 면접관 가운데 한 사람이 그 기백을 사서 나머지 면접관들을 설득한 덕분에 박현채는 농연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한편 1960년 4월에는 민주항쟁이 일어나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박현채는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진보적 혁신 계열 청년들과 폭넓게 교우하고 있었지만, 정작 혁명 대열에는 적극 뛰어들지 않았다. 누구 못지않게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가 이승만 타도의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의문이다. 빨치산 전력이 그의 발목을 잡았을 듯하다.

박현채는 뒷날(1978년) 4∙19혁명 직후 상황을 「4∙19혁명의 경제적 의의」에서, 4∙19혁명 당시 정치조직의 부재, 민중의식의 취약성과 민중의 소시민성, 보수성 등을 지적했다. 4∙19혁명이 보수적인 민주당에게 정치권력을 이양하는 한정적인 혁명이었음을 간파한 셈이다.

박현채는 4∙19혁명 이후에도 정치 문제와는 거리를 두면서 석사 논문을 쓰는 등 학업에만 집중했다. 이 무렵 그를 처음 만났던 김금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현채 형과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와 처음으로 만난 것은 5∙19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말이었다. 나는 당시 수배를 받고 있던 처지였는데, 한 선배의 자취방에서 여럿이 만나 이후의 정세 변화와 민족민주운동의 방향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현채 형이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몇 년 선배쯤으로만 알았지, ‘엄청난’ 경력(발치산 경력)을 지닌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도 그의 인상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범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눈빛이 그러했고, 그가 펴는 논리가 그러했다.

- 김금수, 「‘문화부 중대장’의 이상과 실천」, 『아! 박현채』, 해밀, 2006, 29~30쪽

박현채는 1961년 『자본주의와 소농 경제』라는 논문으로 서울대경제학과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논문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에서 소농의 존재 방식 때문에 농업 문제가 불거졌다고 파악했으며, 과거 농지개혁의 불철저함과 독점자본주의하의 소농 보호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농업의 협업화를 제시했다.

그가 대학원을 졸업한 해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농연 멤버들은 쿠데타의 성격과 주동자들의 정치적 성향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이때 박현채는 5∙16쿠데타의 주체 세력 중 과거에 진보적 성향을 보였던 이들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다. 한번 변절한 사람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4∙19혁명 이후 진보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한다”는 5∙16 주체들의 혁명 공약에서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토론을 벌이던 이들은 일단 몸을 숨기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했다. 한 달 후인 7월 20일 필운동의 한 다방에서 만나 이후의 행동 방향을 논의하기로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져 은신 생활에 들어갔다.

“쿠데타 세력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박현채의 주장은 얼마 뒤 현실로 나타났다. 4∙19 공간에서 활동해온 혁신계 인사들이 모조리 체포되어 ‘혁명재판’의 이름으로 구성된 군사법정에서 징역을 살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박현채는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동 세력의 기회주의적인 변신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농연 멤버들은 약속한 날 필운동 다방에 모여, 피신만 할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군사 쿠데타에 대한 집단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박현채가 그해 11월 병역법 위반으로 청량리경찰서에 피검되고, 김낙중도 10월 말 군입대 영장을 받게 되면서 수포에 그치고 말았다.

병역법 위반으로 군사법저에 송치된 박현채는 자원입대를 조건으로 1962년 1월 석방되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2월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하지만 신병 훈련을 받던 중 7월에 의병제대했다. 빨치산 활동 중에 총탄을 맞은 부위가 덧나서였는지, 이번에도 아버지가 돈을 써서 제대를 시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군사 쿠데타 뒤에도 병무 행정은 지극히 문란하여 돈 있고 힘 있는 집 자제들은 징집에서 면제되거나 입대하더라도 후방에 배치되었다. 전방 부대는 대부분 돈 없고 배경 없는 서민 자제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