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 평전』 빨치산 이력 숨기고 대학 생활을 보내다
3장 ‘지식 보따리상’의 길에 들어서다
화순저널입력 : 2021. 06. 18(금) 18:59
자신의 과거를 숨겨야만 했던
빨치산 출신 대학생
화순경찰서에 수감된 박현채는 부모님의 노력으로 한 달여 만에 풀려났다. 그는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1954년 전남 장성농고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광주를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5월에 전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전쟁의 혼란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공직에 있던 그 아버지가 화순과 광주 여러 경찰서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잡히면 자기에게 아려달라고 여러 군데다 돈을 뿌려놓고 있었다.
그가 붙잡히자마자 연락이 왔고, 또 돈을 듬뿍 뿌리고 그를 빼냈다.
“네가 입산한 줄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다. 이 돈을 가지고 바로 고향을 떠나라. 앞으로 내가 오라고 할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마라.”
아버지는 적잖은 돈뭉치를 밀어놓으며 말했다. 그 집은 부자였으므로 그만한 재력이 있었고, 그런 부잣집 아들이 입산했을 것이라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그 길로 집을 나가 어느 도시 명문 고등학교에 역시 돈을 듬뿍 쓰고 3학년에 편입했다.
박현채는 전주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고, 이듬해인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응시하여 거뜬히 합격했다. 전쟁이 끝난 뒤이기는 하지만 서울대는 여전히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2년여의 ‘산사람’ 활동으로 공부를 접었다가 1년 만에 서울대에 합격할 만큼 그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전주고등학교 학적부를 살펴보면, 공민 98점, 역사 89점, 지리 91점, 작문⋅문법 98점, 한문 찬가 83점, 대수⋅수학 88점, 삼각⋅기하 94점, 생리 76점, 화학 91점, 생물 94점, 교련 84점 등 평균 89점을 받았다.
교수들은 『자본론』 등을 달달 꿰고 있는 박현채의 실력에 쩔쩔맬 지경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정윤형, 전철환, 안병직 등과 후진국연구회라는 학술 동아리를 만들었다. 또한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농촌 봉사를 한 것은 3⋅1운동 직후 아래 처음이었다.
한국전쟁 뒤 한국 사회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전쟁 중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덮으면서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술책으로 반공정책을 국정의 최우선에 두었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 체제가 강회되었고, 모든 가치가 ‘반공’으로 집결되었다. 박현채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전력을 밝힐 이유가 없었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자신이 빨치산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번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화장실에서 고향 후배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자신이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당황한 박현채는 다짜고짜 후배의 멱살을 붙잡아 끌고 화장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기를 보았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겁에 지린 후배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으니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박현채는 대학 졸업 때까지 내내 자신의 이력이 밝혀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물론 그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타락, 이와 더불어 나타난 한국사회의 부패와 젊은 세대의 무기력 현상에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돌적 극단주의를 경계하는 신중함도 있었다. 1957년 3월 26일 친구 김경추에게 『채근담』을 선물하면서 쓴 메모에서 당시 심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중용 : 새 단계의 싸움에 주는 격문!
인생은 투쟁이며 젊음의 상징은 기대이다.
투쟁은 조직화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이율배반적 사상의 예술적 통일!
그를 위해 나는 너에게 동양적 중용, 이를 제시한다. 편중하지 마라.
그러나 전투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투쟁에 있기에.
박현채는 1959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이론경제학과에 진학한다. 부모님이 고향에서 돈을 보내주신 덕분에 전후의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서울 생활은 그다지 궁핍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대학과 대학원 시절 그리고 1961년 4월 28일 여동생의 친구이자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희숙과 결혼할 때까지의 6년여 동안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절이 이니었나 싶다.
박현채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1959년 한국농업문제연구회(농연)가 모집한 연구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연권으로 활동했다. 농연은 1959년에 초대 농림부 차관을 지낸 주석균이 설립했고 유인호, 김병태, 김낙중, 박현채 등 비판적인 농업경제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농업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빨치산 출신 대학생
화순경찰서에 수감된 박현채는 부모님의 노력으로 한 달여 만에 풀려났다. 그는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1954년 전남 장성농고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광주를 떠나 전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5월에 전주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전쟁의 혼란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공직에 있던 그 아버지가 화순과 광주 여러 경찰서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잡히면 자기에게 아려달라고 여러 군데다 돈을 뿌려놓고 있었다.
그가 붙잡히자마자 연락이 왔고, 또 돈을 듬뿍 뿌리고 그를 빼냈다.
“네가 입산한 줄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았다. 이 돈을 가지고 바로 고향을 떠나라. 앞으로 내가 오라고 할 때까지는 집에 오지 마라.”
아버지는 적잖은 돈뭉치를 밀어놓으며 말했다. 그 집은 부자였으므로 그만한 재력이 있었고, 그런 부잣집 아들이 입산했을 것이라고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그 길로 집을 나가 어느 도시 명문 고등학교에 역시 돈을 듬뿍 쓰고 3학년에 편입했다.
- 송기숙, 「만년 야인, 박현채」, 『아! 박현채』, 해밀, 2006, 161~162쪽
박현채는 전주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고, 이듬해인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응시하여 거뜬히 합격했다. 전쟁이 끝난 뒤이기는 하지만 서울대는 여전히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2년여의 ‘산사람’ 활동으로 공부를 접었다가 1년 만에 서울대에 합격할 만큼 그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전주고등학교 학적부를 살펴보면, 공민 98점, 역사 89점, 지리 91점, 작문⋅문법 98점, 한문 찬가 83점, 대수⋅수학 88점, 삼각⋅기하 94점, 생리 76점, 화학 91점, 생물 94점, 교련 84점 등 평균 89점을 받았다.
교수들은 『자본론』 등을 달달 꿰고 있는 박현채의 실력에 쩔쩔맬 지경이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정윤형, 전철환, 안병직 등과 후진국연구회라는 학술 동아리를 만들었다. 또한 학생들을 데리고 농촌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농촌 봉사를 한 것은 3⋅1운동 직후 아래 처음이었다.
한국전쟁 뒤 한국 사회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전쟁 중 자신의 정치적 과오를 덮으면서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술책으로 반공정책을 국정의 최우선에 두었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 체제가 강회되었고, 모든 가치가 ‘반공’으로 집결되었다. 박현채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전력을 밝힐 이유가 없었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자신이 빨치산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한번은 서울대에 입학한 해에 화장실에서 고향 후배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자신이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당황한 박현채는 다짜고짜 후배의 멱살을 붙잡아 끌고 화장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기를 보았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겁에 지린 후배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으니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박현채는 대학 졸업 때까지 내내 자신의 이력이 밝혀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물론 그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타락, 이와 더불어 나타난 한국사회의 부패와 젊은 세대의 무기력 현상에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돌적 극단주의를 경계하는 신중함도 있었다. 1957년 3월 26일 친구 김경추에게 『채근담』을 선물하면서 쓴 메모에서 당시 심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중용 : 새 단계의 싸움에 주는 격문!
인생은 투쟁이며 젊음의 상징은 기대이다.
투쟁은 조직화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이 이율배반적 사상의 예술적 통일!
그를 위해 나는 너에게 동양적 중용, 이를 제시한다. 편중하지 마라.
그러나 전투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투쟁에 있기에.
- 문순태, 「백아산 시절을 이야기하다」, 『아! 박현채』, 해밀, 2006, 125쪽
박현채는 1959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 대학원 이론경제학과에 진학한다. 부모님이 고향에서 돈을 보내주신 덕분에 전후의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서울 생활은 그다지 궁핍하지 않았다.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대학과 대학원 시절 그리고 1961년 4월 28일 여동생의 친구이자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김희숙과 결혼할 때까지의 6년여 동안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절이 이니었나 싶다.
박현채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1959년 한국농업문제연구회(농연)가 모집한 연구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연권으로 활동했다. 농연은 1959년에 초대 농림부 차관을 지낸 주석균이 설립했고 유인호, 김병태, 김낙중, 박현채 등 비판적인 농업경제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이곳은 농업 문제뿐만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서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 등을 검토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했다.
화순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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