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문자라는 쌀로 지은 인간 정신을 담는 그릇과 같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심원한 정신을 섭취하여 드높은 고원으로 존재를 고양시키는 경이로운 모험이자 생의 시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생성의 사건이 될 것이다. <책벌레와 메모광>은 ‘책으로 향한 존재’(Zum- Buch-Sein)로서 문자 한 톨의 배아까지 치열하게 발굴하여 그 궁극의 의미를 음미하고 신생하는 사유의 산파이고자 수불석권(手不釋卷) 분투했던 사람들, 특히 조선 중국 일본의 옛 지식인들과 그들이 발분망식(發憤忘食)하던 책에 관한 이야기다.

옛사람들 그중에서도 선비라 일컫던 사람들은 책에 광적으로 애착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몸의 주림을 가벼이 여기고 책의 향유를 더욱 추구했던 사람들. 예컨데 김정희(金正喜)가 그린 국보 180호 ‘세한도’(歲寒圖)를 봐도 그렇다. 세한도 역시 책과 관련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제주도에 유배당한 고립무원의 그에게 통역관 이상적(李尙迪)이 한양의 숱한 세도가들의 청탁을 뿌리치고 먼저 자신에게 청나라에서 어렵사리 구한 책들을 꾸준히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린 그림이 바로 세한도이다. 세한도의 제발(題跋)은 권세와 이득을 쫒는 씁쓸한 세태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멀어진 자신을 결코 잊지 않은 이상적에게 “날이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는 <논어>의 한 구절에 비추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있다.

<책벌레와 메모광>은 대학교수인 지은이가 2012년 7월부터 1년간 동안 미국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며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물 중의 하나이다.

<책벌레와 메모광>은 1부 '책벌레'와 2부 '메모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책을 소장하고 관리하던 사람들의 자세나 책과 관련한 일상의 풍경을 재미있는 일화를 곁들여 소개한다. 장서인을 찍는 태도, 책을 펼쳐 말리던 포쇄(曝曬)와 같은 연중행사나 책을 훼손하는 벌레들을 방제하고자 책갈피에 끼웠던 은행잎과 운초 또는 독서를 방해하던 모기와 씨름하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박제가, 이덕무, 정약용 등의 글을 펼쳐 흥미롭게 전한다. 2부는 선비들이 책을 읽거나 동무들과 학문을 교우하면서 혹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과정에서 문득 깨달은 자신의 견해나 사유의 단편들을 끊임없이 메모하던 선비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엄격한 자세를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 등을 통해 보여준다. 지은이는 기억은 시간의 풍화작용에 매우 취약하며 '묘계질서'(妙契疾書) 즉 메모야 말로 생각을 잡는 힘이자 새로운 학문과 사유의 단초라고 거듭 강조한다.

2019년 문화관광부가 실시한 ‘국민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종이책 기준으로 성인 1인당 한 해 평균독서량이 6.1권이라고 한다. 책의 내용을 고려치 않고 양적으로만 보더라도 매우 빈곤한 수준이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보다는 휴대폰을 조작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요즘 텔레비전, 신문, 유튜브 등 여러 매체에는 이른바 ‘먹방’이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한다. (먹방은 대상이 그 자체의 고유한 본성 혹은 생태적· 윤리적 의미를 사상당하고 ‘맛과 영양과 식도락을 위한 착취의 세계 속에서 현존재의 도구로만 해석되는’ 적나라한 폭력의 ‘존재론적 제국주의’를 증거한다.) 반면에 우리의 정서와 마음을 다채롭게 채색하는 프로그램은 양적 질적으로 그렇게 다양하지 않은 것 같다. 인간에게는 정서와 사유를 고양시키는 여러 활동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가성비 높은’ 활동은 책읽기가 아닌가 싶다. 여타의 활동은 시간과 경제적인 비용을 요구하지만 책읽기는 일상 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렴하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 장혼(張混)은 그의 절친한 동무 김의현(金義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과 귀에도 즐겁고, 마음과 뜻에도 기뻐서, 빠져들수록 더욱 맛이 있어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은 책을 이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혼자 호젓한 때 적막한 물가에 있다 하더라도, 문을 닫고 책을 펼치고 있노라면, 완연히 수백 수천의 성현이나 시인, 열사와 더불어 한 침상 사이에서 서로 절을 하거나 질타하는 것과 같으리니, 그 즐거움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백 근이나 되는 묵직한 물건은 보통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다섯 수레의 책도 돌돌 말면 가슴 속 심장 안에 넣어 간직해둘 수 있을 것이요, 이를 쓰면 조화에 참여하고 천지에 가득하게 되겠지요…” (…悅乎耳目 飫乎心 志 愈耽而愈味 不知老之將至者 非書籍之謂乎 雖於幽獨之時 寂寞之濱 閉門而開卷 則宛然與千百禩聖賢若騷人烈士 相揖讓叱咜乎一牀之間 其所樂何如哉 …百斤之重 中人不勝焉 五車之書 卷之則存胸臆貯方寸 用之則參造化彌宇宙…)

또한 영국작가 닐 게이먼(Neil Gaiman)은 “책은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꿈”(A book is a dream that you hold in your hand)이라고 말한 바 있다. 코로나가 창궐하여 가까운 지인마저 만나기가 두려운 요즘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 때보다 더 길지 않을까 싶다. 이럴 때 눈과 귀,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며 늙어가는 것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리도록, 저마다의 등불 앞에 두 손 가득히 두툼한 꿈 한 권 펼쳐드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김다록> 자유기고가